[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660년은 백제 왕조가 멸망하던 해였어요. 백제의 마지막 왕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의자왕(재위 641~660)입니다. 의자왕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것이 ‘삼천궁녀’인데요. 삼천궁녀를 거느린 의자왕이 방탕하게 놀다가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잃었고, 이 때문에 부여 백마강변의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스스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죠.
무려 3000명의 궁녀가 떨어졌다는 부여 부소산성 낙화암은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유명 관광지입니다. 그런데 실제 이곳에 가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의문을 품게 됩니다. 낙화암의 크기가 생각보다 작기 때문인데요. ‘과연 여기서 3000명이나 되는 궁녀가 빠졌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되는 것이죠.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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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궁녀는 조선 성종 때 문인(文人)인 김흔의 시조에서 처음 언급이 됐어요. 김흔은 시조에서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라고 표현을 했죠. 명종 때 문신인 민제인도 ‘백마강부’란 시조에서 ‘구름 같은 삼천궁녀 바라보고’라고 썼어요. 역사학자들은 “‘삼천’은 ‘많다’라는 뜻으로 단지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백제의 인구수를 고려해볼 때 삼천궁녀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숫자라는 근거도 있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 따르면 멸망 당시 백제의 가구 숫자는 76만 호(戶)였어요. 1호당 인구는 적으면 3명, 많아야 7명이었죠. 멸망 당시의 1호당 인구를 4~5명으로 추정할 경우, 백제 인구는 304만 명에서 380만 명 정도였다고 계산할 수 있는데요. 만약 궁녀가 3000명이었다면 인구 1000명당 1명이 궁녀였다는 말이돼요. 상식적으로 납득이 어려운 숫자인 셈이죠.
백제보다 영토나 인구 면에서 훨씬 더 컸던 조선에서도 삼천궁녀는 나오지 않았어요. 실록에 언급된 궁녀의 숫자를 보면 태종 때인 15세기 초반에는 ‘수십 명’, 세종 때인 15세기 초중반에는 ‘100명 미만’, 인조 때인 17세기 초중반에는 230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어디서 유래된걸까요. 일부 역사학자들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 학자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분석했어요. 의자왕에 대해서도 왜곡된 기록이 많다는 지적이 나오는데요. 역사에 기록된 의자왕은 삼천 궁녀를 거느린 무능력한 왕이지만 이것은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의 입장에서 쓴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죠.
백제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충남 부여군은 ‘신편 사비백제사’라는 역사서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백제사 전문가 40명이 참여해 2년 반 만에 3권의 책으로 완성한건데요. 현재도 올바른 백제사 알리기는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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