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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경북)=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외나무다리로 꽃가마 타고 시집왔다가 죽으면 그 다리로 상여가 나갔다.” 선비마을로 불리는 경북 영주의 무섬마을. 이 마을 주민들은 무섬마을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들에게도 무섬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렇다고 깊은 산중이나,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 마을이 자리한 지형이 그만큼 독특하다. 마을 뒤로는 태백산 끝자락과 이어지고, 강 건너에는 소백산 줄기가 스며든다. 그 사이로 태백산과 이어지는 내성천, 소백산에서 흘러내린 서천이 이곳에서 몸을 섞으면서 마을을 감싸 안은 형국이다. 마치 산과 물이라는 자연의 성벽 속에 갇힌 모양새다.
◇물 위에 떠 있는 섬, ‘무섬마을’
무섬마을을 찾아가는 길. 중앙고속도로에서 영주IC로 나와 영주시내 초입에서 문수문 와현리 방향으로 향한다. 수도리 전통마을 표지판을 따라 운전대를 잡으면 된다. 굽이굽이 돌아 도착한 곳은 무섬마을 입구. 마을로 들어서려면 마을 앞 다리인 수도교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마을 뒤편에 자리한 무섬교와 함께 육지 속 섬마을과 이어주는 통로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 마을과 바깥을 잇던 것은 외나무다리 하나뿐이었다. 외나무다리는 여전히 무섬마을의 안과 밖을 잇고 있지만, 지금은 마을 주민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이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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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전, 잠깐 무섬마을 소개부터 들어본다. 먼저 마을이름이 ‘무섬’된 이야기부터다. 내성천 맞은편에 서서 무섬마을을 보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수도리로 불렸다. ‘수도’의 순우리말은 ‘물섬’이다. 이 물섬이 세월이 흐르면서 ‘ㄹ’은 내성천 물길 따라 흘러간 듯 사라지고, 지금의 무섬이 됐다는 것이다.
마치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와 비슷한 풍경. 단종의 한(恨)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은 물과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을 절벽으로 막혔다는 점만 뺀다면 그 형태나 모양이 너무도 비슷하다. 이런 풍경을, 모습을 가진 마을을 두고 ‘물돌이마을’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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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을 가진 마을은 여러 곳이 있다. 특히 낙동강을 끼고 있는 물돌이 마을은 총 3곳. 안동의 하회마을과 예천의 회룡포마을, 그리고 무섬마을이다. 그중 무섬마을은 가장 덜 알려졌는데, 나머지 두 마을보다 더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여기에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을 중시했던 무섬마을 사람들의 선비 성향도 한몫했다. 그런 까닭에 근래 들어 한번 알려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유혹에 이끌려 이곳을 찾고 있다.
이곳을 한번이라도 찾은 사람들은 무섬마을에서 세번 놀란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선은 마을을 품은 산과 물줄기에 놀라고, 그 안에 들어선 고택을 보고서 놀란다. 마지막으로 이 마을이 품은 선비정신에 또 놀란다는 것이다. 고단한 일상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청정하고 고고한 정취를 가진 마을인 것이다. 그래서 무섬마을을 두고 양반마을이 아닌 선비마을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고 호사가들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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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년간 마을 이어준 외나무다리에 오르다
사실 무섬마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마을에는 40여 채의 고택이 있는데, 그중 30여 채가 조선 후기의 사대부 가옥이다. 반남 박씨 입향시조가 지은 ‘만죽재’, 선성 김씨 입향시조가 지은 ‘해우당’ 등을 포함해 9채가 지방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김화진 선생이 세운 ‘아도서숙’도 빼놓을 수 없다. 아도서숙은 1933년 일제에 강제로 폐숙될 때까지 주민들에게 한글과 농업기술을 교육했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무섬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류 쪽에 있는 옛 다리다. 무섬마을의 상징인 외나무다리다. 이 다리는 무섬교와 수도교가 생기기 전에 많이 사용됐다. 1983년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350년이 넘도록 하천 바깥과 마을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였다.
다리는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상판을 만들고, 그 아래 ‘ㅠ’자형 다리를 설치한 다음 하나하나 연결했다. 폭은 30cm, 높이는 60cm, 길이는 150m에 달하는 길고 좁은 다리다. 직선이 아니라 물길에 순응하듯 ‘S’ 자형이다. 이 다리는 무섬마을 주민들의 사연이 차곡차곡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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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나뿐이지만, 과거에는 외나무다리가 세 개 있었다. 상류의 다리는 장 보러 나갈 때, 가운데 다리는 아이들이 학교 갈 때, 하류의 다리는 농사지으러 갈 때 소를 몰고 건넜다. 아낙들은 꽃가마를 타고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왔으며, 나이든 어른들은 꽃상여를 타고 다리를 건너 세상과 영영 이별했다.
이 다리들이 홍수가 나면서 물길에 쓸려 내려가 새 다리를 놓았다. 과거에는 물살이 강해 긴 장대에 의지해서 건너기도 했다. 그 삶의 우여곡절이 외나무다리라는 이름처럼 위태하고 끈덕지게 다가온다. 지금은 하류의 다리만 복원했다. 그렇게 외나무다리는 무섬마을의 역사는 물론 이곳에서 살고 있거나 살았던 주민 모두에게 각각 다른 추억을 안겨주고 있다. 내성천을 건너 마을로 들어선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의 한 시골마을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다. 대부분은 벼슬도 하지 않던 무섬마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서서 산과 강에 안겨 즐겼던 그들의 유유자적한 삶이 그려진다. 욕심도 싸움도 없는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생활이다. 현대적이고 편안한 것 대신 여유 있게 한 박자 쉬어가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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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에서 무섬마을과 함께 가면 좋을 곳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소수서원’은 영주를 대표하는 곳 중 하나다. 1888년까지 4300여 명의 유생을 배출해낸 조선시대 최고의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한국 유교 문화의 발상지인 소수서원 인근에는 선비촌이 있다. 선현들의 학문 탐구 장소 및 전통 생활공간을 재현한 체험 교육장으로,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인 ‘부석사’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부터 사찰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무량수전까지는 총 108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는 108가지의 번뇌를 의미한다. 부석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바로 국보 제18호로 지정된 무량수전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로, 목조건물의 예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