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울러 재판부는 묵시적 청탁이라는 표현을 동원, 삼성이 그룹 현안을 두고 박 전 대통령에게 적극적인 청탁행위를 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을 인정했다. 청탁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부족했던 때문이다. 항소심에서도 삼성 변호인단이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파고들 것이란 전망이 많다
반면 변호인단은 최순실(61·구속기소)씨에 대한 승마지원 등 금품 제공이 이 부회장에 보고 없이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 등 경영진 독단으로 이뤄졌으며, 경영승계 작업 또한 추진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 得 ‘뇌물액 433억→88억·朴 요구로 공여·묵시적 청탁’
1심에서 삼성 측은 400억원대에 달했던 뇌물혐의 액수의 상당부분을 줄인 것에 안도하는 표정이다. 앞서 특검은 삼성의 정유라에 대한 불법 승마지원액 213억(실제 지급액 78억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204억원,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영재센터) 지원액 16억원 등 433억을 이 부회장의 뇌물혐의액수로 봤다.
법원은 이중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204억원)은 모두 무죄로 판단했으며 불법 승마지원액 중 실제 집행되지 않은 부분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가 인정한 뇌물은 영재센터 지원액 16억원과 승마지원액 중 72억원 등 88억원이다. 특검이 기소한 내용과 비교할 때 약 30%만 실제 뇌물로 인정된 셈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요구에 이 부회장이 수동적으로 응하여 뇌물을 공여했다’고 법원이 판단한 것도 삼성에 유리한 부분이다. 이 같은 부분은 이 부회장의 형량이 인정된 혐의보다 낮게 나오는데 영향을 미쳤다.
또 재판부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삼성생명 금융지주사 전환 등 개별현안에 대한 청탁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부분이다. 1심 법원이 ‘포괄적 현안으로서 묵시적 청탁을 했다’는 다소 애매한 논리를 내세운 것은 그만큼 결정적인 직접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항소심에서 삼성이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대법원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항소심은 1심보다 훨씬 엄격하게 판단해 유·무죄가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며 “1심 판결은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항소심 결과를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재판장 김진동)는 25일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며 이 부회장이 삼성의 ‘사실상 총수’이며 이 부회장에 대한 경영권 승계 작업이 미래전략실 주도로 지속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을 인정했다. 삼성 측은 “승계 작업은 특검이 만든 ‘가공의 틀’이며 이건희 회장이 살아있는 상황에서의 승계 작업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부회장 경영권 승계 작업에 대해 “삼성전자 등 계열사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임은 누구나 쉽게 인식하고 있다”고 삼성 측 주장을 일축했다.
또 삼성물산 합병, 삼성생명 금융지주 전환 등 삼성이 추진한 일련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대해 “오로지 이 부회장만을 위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 부회장의 지배력 확보를 중요한 목적으로 한 것”이라며 “포괄적 승계 작업”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뇌물 사건의 핵심 사안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간 합병에 대해 “합병을 통해 지배구조가 단순화되고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성물산의 지배력이 강화된다”며 “두 회사간 합병은 이 부회장의 승계 작업과 연관돼 있다”고 밝혔다. 또 삼성생명 금융지주 전환과 관련해서도 “결과적으로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나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력 확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효과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삼성 컨트롤타워인 미전실 역할에 대해 “이 부회장의 경영 지배권을 돕는 조직”이라며 “미전실 임직원들이 지배력 확보를 위해 개별 현안에 적극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이 부회장이 다른 피고인들(최지성·장충기·박상진·황성수)에게 승마 지원과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을 지시했다”고 명시했다.
삼성 측은 그동안 이 부회장의 삼성 내 위치에 대해 ‘총수가 아닌 후계자’로 미전실 등 그룹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또 미전실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이 부회장이 아닌 최지성 전 미전실장이라며 두 사람의 관계가 멘토(최지성)와 멘티(이재용)라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 등 삼성 관계자들도 법정에서 이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지만 재판부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관여와 관련된 삼성 관계자들의 진술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문자메시지와 언론 보도 등의 신빙성을 더 높게 평가했다.
◇ “1심서 판결한 사실관계 인정 후 법리로 다퉈야 ”
법조계에선 삼성이 변론 전략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항소심에서는 재판부가 여지를 남기지 않은 판결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사실관계는 인정하고 법리를 다투는 방식으로 모든 혐의에 대해 ‘완전 무죄’를 주장하기보다는 ‘일부 유죄’를 감수하는 변론을 전개 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삼성 변호인단의 ‘All or Nothing’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이 관계자는 “대통령 직무 범위를 다퉈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승계 관련 현안이 위임사무(委任事務) 대상으로, 대통령의 실질적 직무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는 편이 재판부 설득력에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던가, ‘오너지만 총수는 아니다’ 라는 식의 일반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주장에 대해서던 변론전략을 재검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지배구조 개편으로 이 부회장의 지배력이 높아지는 건 상식”이라며 “재판부 앞에서의 경영승계를 부인하는 진술은 반성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경지법 한 판사는 “‘이재용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주장을 믿을 판사들이 있을지 의문”이라며 “대통령 뇌물죄 판례를 피하려 한 것 같지만, 통하기 힘든 전략이었다”고 지적했다.
한 대형로펌 소속 변호사는 “1심 판결이 인정한 사실관계 중 기초적인 건 인정하고 법리로 다퉈야 한다”며 “이 부회장이 이 사건과 전혀 관계 없다는 식의 변론은 도박에 가깝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