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성장기와 달리 저성장기에는 물가가 안정 목표인 2% 수준에 수렴하더라도 경제순환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고성장기 타성에 젖어 성장에 급급해 재정과 금융을 남발하다가는 물가만 치솟게 하고 깜짝 성장에 그치거나 흐지부지되기 쉽다. 문제는 저성장기일수록 물가안정보다 성장을 우선시할 가능성이 커지기에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지출 증가와 유동성 완화를 경계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 없이 유동성 완화를 반복하다가는 어느덧 경제체질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자칫 포퓰리즘으로 진전될 우려도 있다. 저성장 시대를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물가안정에 주력하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진정시켜야 한다.
한국경제는 2024년 경제성장률 연 2.5% 내외, 소비자 물가상승률 또한 2% 중후반으로 예상돼 시각에 따라서는 물가안정 국면으로 진입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장률에 비해 상대적 물가수준(level)은 현재 크게 높은 상황이다. 2020년을 100으로 할 때, 2023년 소비자 물가지수는 111.6, (달러 환산) 국내총생산(GDP) 지수는 105.2로 코로나 사태 이후 누적 물가상승률은 11.6%에 이르는데 경제성장률은 5.2%에 불과하다. 낮은 성장률에 비해 높았던 물가상승률로 우리나라 물가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2024년 현재 소득 4~5분위 계층은 씀씀이를 줄이더라도 소득이 최저 소비 수준을 따라가지 못해 살림살이가 쪼들리고 있다.
물가는 오르는데 소득 증가가 미미하면 소시민, 노후 가구가 마주하는 체감물가는 더욱 높아진다. 가계는 열심히 일해도 미래가 잘 보이지 않아 의욕 또한 사그라지기 쉽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20%가 넘어가는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거리의 빈 상자들을 주워 모아도 월 수입 70만 원이 고작이라는 빈곤 노인들이 고물가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 부끄러운 심정이다. 저성장기일수록 생산성 증대보다 경기 부양책 남발을 선호하다가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인플레이션 압력만 커진다.
선진국 진입 장벽을 넘어서려면 근검절약하는 국민 누구든 기초생활에 대한 불안이 없어야 하는데 그 첫 번째 필요조건은 물가안정이다.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른 양극화 심화로 소득 불평등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한국경제는 내수경기 침체와 생활물가 상승으로 영세 자영업자 같은 저소득 계층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기상이변이 ‘뉴 노멀’이 되는 데다 농촌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근원물가와 농수산물 물가를 따로 떼어 따지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를 희생하면서 성장 정책을 펼친다면 부작용은 확대되어 갈 수밖에 없다.
분명한 사실은 잠재성장률을 뛰어넘는 고성장을 추구하다가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시달릴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저성장 시대에 억지로 성장률을 높이려다가는 성장피로감이 가중되는 데다 물가만 자극할 가능성이 크다. 경기를 부추기려 억지로 재정·금융 완화를 서두르다가는 결국 물가 압력을 이기기가 어렵게 된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뿌리내리면 좀처럼 헤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포퓰리즘으로 패망한 국가들의 경험이 잘 설명하고 있다. 눈앞의 성장보다는 멀리 보고 성장잠재력 배양에 힘써야 하는데 그 바탕은 언제 어디서나 물가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