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정유선 조지메이슨대 교수(44)다. 대부분은 초등학교 운동회 풍경이 먼 과거의 일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겠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그녀는 다리가 불편하다. 언어장애도 있어 긴장하면 더 말문이 막힌다. 그 상황을 두고 “다른 친구들 하는 것은 뭐든 잘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조지메이슨대 교수가 된 후 2012년엔 이 학교에서 최고 교수상도 받았다. 그녀는 이를 ‘작은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지난달 30일 이데일리·이데일리 TV 주최로 열린 제3회 세계여성경제포럼(WWEF2014)에서 발제자로 나선 그녀를 만났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낀 건 그녀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 얼굴엔 웃음과 활력이 넘친다. 매 순간 모든 것이 도전이었을 그녀의 인생사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적지 않았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
“아버지는 어릴 적 저에게 교수가 되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제가 공부는 곧 잘한다고 보신 거죠. 전 아버지가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어요. 사춘기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게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과 사진에 찍히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모순적이게도 둘 다 하고 있어요(웃음)”
별다른 비결은 없었다. 그녀가 몇 년 전 내놓은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란 책 제목처럼 꿈을 향해 정직하게 한 발짝씩 나아갔을 뿐이다.
정 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말이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면 남들도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고 믿고 있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고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만 오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장애란 스스로 심리적 한계를 긋고 자신과의 싸움을 쉽게 포기해버리는 행위 그 자체라고 봐요.”
그녀는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친 뒤 1989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미국 생활이 쉽지 만은 않았다. ‘노력하면 다 된다’고 믿던 그녀도 영어 때문에 번번이 좌절했다. 영어를 읽고 쓰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한국말을 하는 것도 어려운 그녀에게 영어 발음은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그녀는 지금도 대화의 3분의 1 정도는 서로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살면서 처음으로 포기하고 싶었을 때가 영어를 배울 때였어요.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더 힘들었습니다. 긴장돼서 말을 못한 적도 많았어요. 울기도 많이 울었죠. 그때마다 흔들리는 절 잡아준 건 부모님이었어요. 한국에 계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버텼습니다.”
◇“부모님께 반항은 생각도 못해”
그녀는 인터뷰 도중 부모님 얘기를 자주 꺼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강연을 할 때엔 부모님을 얘기하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내가 뇌성마비 진단을 받은 뒤부터 부모님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셨다”고 말했다.
정 교수의 어머니 김희선씨는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로 시작되는 ‘울릉도 트
|
그녀는 철이 일찍 들었다. 사춘기 시절엔 부모님께 반항 한번 하지 않았다. “전 정말 행운아예요. 부모님께 무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니까요. 제가 밝게 자랄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 영향이 큽니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저한테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칭찬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그런 큰 사랑을 받았는데 반항은 감히 생각조차 못했죠(웃음)”
그녀는 스스로 인복이 많은 편이라고 했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도 먼저 다가가는 편이다. 정 교수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한국 속담처럼 저도 웃는 얼굴로 먼저 다가간다”며 “사실 이건 장애를 가진 내가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 “박사학위를 한 뒤 강의를 제안한 것도 지도 교수님이었다”며 “이렇듯 주변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미국에서 여성 장애인으로서 소수자 중의 소수자인 내가 교수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보조공학(assist technology)을 선택하게 된 것도 운명 같다고 했다. 보조공학은 장애를 가진 분들이나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겪는 불편함을 개선하는 기기나 서비스를 총칭하는 말이다. 손이 불편한 사람들에겐 휘어진 숟가락도 훌륭한 보조기기가 될 수 있다. 정 교수는 원래 컴퓨터공학으로 학·석사 학위를 땄지만 아이를 낳고 7개월 뒤 보조공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석사 마치고 컴퓨터를 다루는 직장을 구할까 했지만 첫 아이를 가지면서 진로에 대해 다시 생각했어요. 컴퓨터 회사에 다니는 것도 좋지만 제가 다른 엄마와 다르기 때문에 장애와 관련된 보조공학을 공부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보조공학 교육 쪽을 전공했는데 계속 이과였다가 박사 공부할 때 문과로 넘어왔죠. 지금 생각하면 보조공학을 만난 것도 운명 같습니다.”
그녀는 우리 사회에서도 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국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미국이 훨씬 더 자유로워요. 제가 길을 걸어가면 한국에선 10명 중 7명이 뒤돌아보겠지만 미국은 1명만 그럴 겁니다. 장애인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사회적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하면 된다’라는 의지만으로 모든 걸 할 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