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문영재 민재용 김정남 기자] 한 때 세계 손톱깎이 시장을 석권한 중견기업 A사는 최근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휘청거리고 있다. 창업주가 가족과 임직원들에게 나눠준 주식 240만주(약 370억원)가 화근이었다. 세법상 증여가 아닌 상속으로 분류 돼 상속세 150억원 마련을 위해 경영진이 회사지분을 B사에 넘겼고 이후 헐값에 매각·재매각되는 신세를 맞고 있다.
기초무기화학물질을 제조·판매하는 중견기업 C사는 지난 2009년 창업주 단독대표에서 부자 대표체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원활한 가업승계를 위해 불가피하게 주식을 매각하게 되면 최대주주 지분율이 기존 34%에서 14%로 급감하는 처지. 가업승계 때문에 경영권 위협에 노출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회사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중견기업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조세정책이다.
이른바 가업승계상속세 부담과 일감 몰아주기 과세 등 중견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조세정책으로 중견기업들의 경영권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업계는 급기야 ‘중견기업법’ 제정을 촉구하며 대응책 마련에 나섰지만, 관련 법안은 국회의 무관심속에서 진전된 논의 없이 서랍속에서 낮잠만 자고 있다.
◇ 가업승계상속세 일감몰아주기 과세..중견기업 경영 ‘걸림돌’
C사와 같이 매출액 2000억원을 넘는 중견기업의 40% 정도는 세법상 가업승계제도 대상에서 제외된다. 공제지원 범위는 최대 300억원까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공제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창업주가 기업을 20년 이상 운영해야 한다.
도중에 가업용 자산을 일정 부분 처분하거나 보유 지분이 줄면 상속세가 부과된다. 전문가들은 공제한도액 300억원을 폐지, 상속세를 100% 감면해주는 독일식 시스템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가업승계상속제도 대상기업의 기준을 매출액 1조원 이하로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연구개발(R&D) 지원 강화도 중견기업에게 절실하다. 현재 매출액 3000억원 이상 중견기업의 R&D 투자세액공제율은 신성장동력 20%, 원천기술 20%, 일반연구·인력개발비 40% 등 대기업과 동일한 수준이다.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과세’에 대해 대기업과 달리 중견기업에 대해선 요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기업의 물량 몰아주기를 통한 부의 대물림을 막기 위해 이 제도가 마련됐지만, 세무정보에 취약한 중견기업에까지 적용되면서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현행 일감 몰아주기 과세는 위헌적 측면이 많고, 기술경쟁력 강화, 원가절감, 보안유지 등을 위한 기업의 정상적 경영활동까지 위축시킬 수 있는 만큼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중견기업법’ 제정, 기업경영 숨통..정치권은 걸음마 단계
중견기업들은 중소기업청이 검토 중인 중견기업법 제정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 법안은 매출액 기준으로 중견기업의 범위를 정하고, 중소기업 졸업기업들의 부담을 단계적 축소하며, 개별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 등을 담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중견기업법 제정안에 대한 논의는 거의 진척이 없다. 국회 통과를 기다리는 계류 법안조차 없는 실정이다.
국회 주무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관계자는 “중소기업을 위한 법안은 있지만 중견기업 맞춤법은 지금껏 없었다”며 “지난해 대선 이후에야 정치권에서 공론화되면서 그나마 장이 마련된 분위기”라고 전했다.
국회 재정위원장인 강길부 새누리당 의원과 국회 산업위원장인 강창일 민주당 의원 등이 최근 ‘경제재도약, 중견기업에서 찾다’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벌인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일각에선 정치권에서 의원입법 형태로 중견기업육성법 제정을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 중이지만 아직 설익은 단계인 것으로 전해졌다.
<용어풀이> 중견기업: 산업발전법에 따르면 중견기업은 중소기업을 졸업한 기업 중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 속하지 않는 기업들이다.
제조업 기준으로 보면 상시근로자 수 300명 이상, 자본금 80억원을 초과한 기업은 3년간 유예를 거쳐 중소기업을 졸업하게 된다. 중견기업연합회가 집계한 국내 중견기업 수는 지난해 말 현재 1422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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