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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경제민주화 입법버블

송길호 기자I 2013.07.11 07:00:00
[이데일리 송길호 정경부장] 모든 규제는 공익의 탈을 쓰고 있다. 정의를 표방하는 국가기관은 정책목표 달성을 명분으로 강제적 규율을 동원한다. 그러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명약도 부작용을 내포하듯 이상적인 규제도 반드시 희생과 비용을 초래한다.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획일적이고 경직적인 규칙은 의도하지 않은 다른 가치를 일정부분 훼손하기 때문이다. 바로 규제의 환상, 규제의 역설이다.

경제민주화의 파고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일명 일감몰아주기 규제법·금산분리 강화법·프랜차이즈법 등 이른바 경제민주화 3법은 강력한 규제의 날개를 달고 6월 국회를 가볍게 통과했다. 남양유업 방지법·신규순환출자 금지법 등 일련의 법안들도 규제의 칼날을 다듬으며 9월 정기국회를 기다린다. 지난해 대선과정에서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를 구호로 내걸었던 정치권은 이제 그 실현 방안을 둘러싼 격론으로 치열하게 대립한다.

경제민주화는 시대정신이다. 고도압축성장시대의 그림자인 경제생태계의 불공정을 바로 잡기 위한 공정의 레토릭이다. 시장의 실패를 ‘보이는 손’으로 재단하려는 정치권력의 의지, 그리고 특권적인 경제권력의 전횡과 반칙에 분노한 일반 국민의 정서적 공감대가 절묘하게 합치된 공존· 공생· 상생의 철학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화의 과정은 혼돈의 연속이다. 경쟁적 여론몰이, 무분별한 실적주의, 인기 영합주의의 확산으로 법리적 이성을 상실한 입법만능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19대 국회 1년간 발의된 의원입법만 10일 현재 5292건, 의원 1인당 18건이다. 3년후 19대 국회가 마무리될 즈음엔 전체 의원발의 법안만 4만건에 이른다는 전망이 무리는 아니다. 16대 1912건, 17대 6387건, 18대 1만2220건 등 이전 국회와 비교하면 입법홍수가 따로 없다. 이들 의원입법의 절대비중은 경제민주화를 모토로 내건 우후죽순 규제법안이다.

모든 규제는 선의로 포장된다. 하지만 규제의 획일성· 경직성은 필연적으로부작용을 잉태한다. 더욱 불행한 건 역진성이다. 한번 만들어진 규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실패한 규제를 치유하기 위해 또 다른 규제가 나타난다. 규제가 도입되면 그에 따른 이해관계가 형성되고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파워계층은 해당 규제를 더욱 공고히 하게 마련이다.

친기업, 친시장을 표방하며 ‘전봇대 규제’의 철폐를 공언하던 이명박정부 시절 규제의 총량이 가장 크게 늘어난 건 우연이 아니다. 출범 직전 규제건수 5116건, 5년만에 1만3914건으로 1만건 가까이 급증했다. ‘손톱 밑 가시를 뽑겠다’고 장담한 박근혜정부에서도 이 같은 모순은 이어질 조짐이다. 국회의 과잉 규제입법이 넘쳐나면서 출범 3개월만인 지난 5월말 기준으로 882건, 그동안 일몰 등으로 없어진 규제를 감안하면 1338개의 규제가 신설됐다(규제개혁위원회 분석). 경제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규제는 물밑에서 독버섯처럼 무럭무럭 증식하고 있는 꼴이다.

규제에 따른 비용 편익 분석 없이 자의적으로 이뤄지는 무책임한 경제민주화 입법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자정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국회 차원에서 규제에 따른 이익과 비용을 분석할 수 있는 전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일이다. 미국의 의회감시원, 영국의 규제개혁전담위원회, 독일의 국가규범통제위원회 같은 공신력 있는 규제심사기관을 의회에 신설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공명심으로 무장한 정치권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규제의 칼끝은 어디로 향할까. 모두들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착각들 하지만 그들의 제한된 시야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이고 거친 규제의 칼날은 의도하지 않는 공익의 훼손을 초래하는 건 아닐까. 기대효과보다 역효과가 큰 규제, 기회주의적 탈법을 조장하는 규제, 특정가치에 매몰돼 다른 폭넓은 가치를 잃어버린 규제,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일면만 바로보는 바로 그 근시안적인 규제. 경제민주화 실현과정에서 드러난 ‘입법버블‘의 혼란과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돌아오는 건 아닌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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