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꾸라진 시장 분위기는 물론 1세대 K뷰티숍을 바라보던 투자자들의 분위기가 몰라보게 달라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수금융 연장 실패로 에이블씨엔씨 최대주주가 기한이익상실(EOD) 사태에 빠진 상황에서 매각 작업이 뜻대로 흐를지도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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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 시작으로 화장품 볼트온
에이블씨엔씨는 지난달 16일 매각 작업을 공식화했다. 에이블씨엔씨는 “당사 최대주주인 주식회사 리프앤바인에게 확인한 결과, 크레디트스위스(Credit Suisse)를 자문사로 지분 매각 및 투자 유치 등 다양한 전략적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공시했다. 에이블씨엔씨는 이달 14일에도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결정되거나 확정된 사항이 없다”고 덧붙였다.
시계를 5년 전으로 돌려보자. 에이블씨엔씨는 2017년 경영참여형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IMM프라이빗에쿼티(PE)가 2017~2018년에 걸쳐 총 4182억원을 투자해 에이블씨엔씨 지분 59.2%를 인수하며 경영권을 꿰찼다. 총 투자금 가운데 약 1200억원을 인수금융으로 조달했다.
에이블씨엔씨 최대주주로 있는 리프앤바인은 광고 대행·제작 업무를 하는 에이블씨엔씨 자회사였다. 그런데 에이블씨엔씨 인수 당시 IMM PE가 설립한 투자회사 비너스원이 리프앤바인 주식 100%를 취득한 뒤 비너스원이 리프앤바인에 주식 양수도 계약상 양수인 지위를 부여하면서 에이블씨엔씨를 인수했다.
에이블씨엔씨는 지난 2000년 ‘미샤’를 선보이며 저가 화장품 브랜드 시장을 열었다. 미샤는 당시 화장품 한 개에 3300원이라는 혁신적인 가격대를 선보이며 시장에 돌풍을 몰고 왔다. 2012년에는 에스티로더 ‘갈색병’에 도전장을 던진 ‘보라색병’ 제품 등을 출시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중저가 브랜드간 경쟁이 치열해진데다 여러 가지 아이템을 한곳에서 살 수 있는 뷰티&헬스 편집숍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에이블씨엔씨를 인수한 IMM PE는 내심 밸류업(가치상향)에 자신이 있었다. PEF 운용사들의 주특기인 볼트온(동종기업 추가인수)를 통해 시너지를 낸다면 승산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때마침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K뷰티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점도 한몫했다. 실제로 IMM PE는 에이블씨엔씨를 앞세워 2018년 미팩토리, 2019년 지엠홀딩스와 제아에이치앤비 등 여러 화장품 회사를 차례로 인수하며 덩치를 키워 나갔다.
코로나19 타격…인수금융 연장 실패
예상대로 진행되는가 싶던 밸류업 플랜은 2019년 이후 삐걱대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19 사태가 치명타로 작용하며 인수 기업들의 실적이 적자를 기록했다. 최대 소비처가 됐어야 할 중국 시장이 정치·경제 갈등으로 활기를 잃은 점도 영향을 미쳤다.
리프앤바인은 지난해 연결 재무제표 기준 순손실 1407억원을 기록했다. 직전 해에도 449억원 순손실을 기록했는데 1년 만에 손실 규모가 3배 이상 늘었다. 매출은 3075억원으로 같은 기간 27.2% 줄고, 영업손실은 842억원으로 전년(-145억원)보다 6배 가까이 늘었다. ‘볼트온’과 같은 경영 전략은 에이블씨엔씨에는 먹히지 않았다.
에이블씨엔씨가 M&A 매물로 등장한 이유로 실적 악화 말고도 인수금융 만기 거절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관측도 있다. 리프앤바인은 에이블씨엔씨 인수금융 만기가 얼마 남지 않자 대주단에 인수금융 연장을 타진했다. 그러나 대주단에 있던 신협이 이를 거절하면서 EOD 상태에 빠졌다. ‘더는 기다려 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실히 한 것이다.
신협이 에이블씨엔씨 최대주주에 대한 인수금융 연장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업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꼽는다. 일단 최대주주가 대주단에 보인 행동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재무약정을 위반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인수금융 만기 유예까지 해줬지만, 구체적인 개선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대주단 입장에서 웨이버(의무면제)를 해주면 이에 대해 유상증자나 후순위 자금 차입을 통해 선순위 대주단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범위나 규모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에이블씨엔씨라는 회사 자체를 보는 시각이다. 주가라는 게 회사의 본질적 가치를 100% 반영하진 않지만, 주가가 크게 빠진 현 상황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대주단 안팎에서 ‘인수금융 만기 연장 이후 주가가 더 빠지면 어쩌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이라도 대출 연장을 거절해 잔존 가치라도 방어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매각가 2000억 예상…투자금 ‘반토막’
매각 작업이 구체화한 상황에서 과연 얼마에 팔릴지도 관심사다. IMM PE 인수 당시 에이블씨엔씨에 책정한 주당 단가는 2만5000원이었다. 당시 거래 주가(1만8000~2만1000원)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은 가격이었다. 14일 에이블씨엔씨 종가가 4310원인 점을 비교하면 무려 83% 쪼그라든 가격이다.
현재 업계에서 점치는 에이블씨엔씨 예상 매각가는 약 2000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투자금액을 감안하면 사실상 절반 수준에 매각에 나선 셈이지만 14일 기준 에이블씨엔씨 시가총액(1162억원)의 두 배 가까운 가격을 원한다는 점에서 이마저도 녹록지 않아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눈물의 손절’ 수순을 밟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시간을 두고 후한 값을 인정해줄 원매자를 차근차근 찾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최근에는 IMM PE에 에이블씨엔씨를 매각한 서영필 전 회장이 SNS에 글을 남기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에이블씨엔씨의 예상 매각가를 언급하며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매도자의) 꿈이 너무 과하다”며 “그냥 저 돈 나주라”고 말했다. 이어 본인이 새로 만든 화장품 브랜드 홈페이지를 첨부하며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작금의 상황은 차치하더라도 창업주의 발언치고는 경솔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한편으론 그만큼 에이블씨엔씨 안팎의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얘기도 있다.
에이블씨엔씨 사례가 자본시장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예상 시나리오대로 시장은 절대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생각대로 기업을 운영하고 가치를 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자본시장이란 곳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뜻밖의 수익률 대박에 자만할 필요도, 예상치 못한 손실에도 결연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 이유도 어쩌면 한 치 앞을 모르는 시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