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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제대로 대면할 수 있었던 기회 말이다. 웃는 눈과 입이 얼굴 절반을 차지하는 ‘요술공주’든, 그 공주에게 리본 달린 곰머리봉을 들리고 보석 박힌 크라운을 씌워낸 ‘작가’든.
결코 어긋났을 뿐이라곤 못한다. 차라리 피해왔다는 게 맞을 거다.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거다. 현실성이라곤 1도 없어 보이는 그 화면에서 어떤 얘기를 끌어낼 수 있을지 막막했던 거다. 대놓고 ‘초현실’이라면 오히려 쉬웠을 것을. 그것도 따지고 보면 현실에서 출발했을 테니까. 하트가 날고 별이 번쩍이는 캔버스가 쏟아내는 행복바이러스를 온전히 받아낼 백신그릇은 준비하지 못했던 거다.
사실 이 복잡한 상황을 ‘비겁한 변명’처럼 꺼내놓은 데는 이유가 있다. 결론적으로, 참 오래 묵혔던 그 편견이 박살 난 현장을 보여야 해서다. 명작에는 명작의 사정이, 졸작에는 졸작의 형편이 있듯, 일에서든 삶에서든 작가가 내긋는 붓길에는 까닭이 있고 스토리가 있는 법인데. 그걸 또 간과했던 거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던 늦은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으로 향했다. 시꺼먼 밖과는 영 다른 안이다. 예상보다 환하고 그보다 더 밝았다. ‘꿈은 이뤄진다’(Dreams Come True)란 타이틀로 스무 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작가 이사라(42)를 드디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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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만의 색 찾는 과정…‘도망’ 아닌 ‘성숙’
유난히 전시가 많았던 작가다. 지난 5년 동안 개인전만 일곱 번이다. 주요 단체전은 대충 꼽아도 30회를 훌쩍 넘긴다. 그런데 이번 개인전을 굳이 인사동 터줏대감 노화랑에선 연 사유가 있을까. “또래 작가들의 작업량이 원체 많은데 그걸 열심히 한다고 인정해주신 덕”이라며 작가는 애써 공을 돌린다.
사실 ‘이 작가를 이젠 만나야겠다’고 했던 중요한 명분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노승진(74) 노화랑 대표. 44년간 화랑 운영을 하는 동안 그이가 발탁해 한국미술계에 세운 수많은 작가들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했다. 그런 노화랑이 처음 연 ‘이사라 개인전’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른 하나는 화백 이석주(69·숙명여대 회화과 명예교수)다. 한국 극사실주의 회화 1세대로, 빈틈없이 옮겨놓은 그림도 모자라 먹먹한 전율까지 입혀내는 하이퍼리얼리즘을 지금껏 고수하고 있는 그 화백의 딸이 이 작가다. 이 화백이 아버지니, 할아버지는 현대연극의 선구자인 이해랑(1916~1989) 선생이 된다. 그 계보가 과연 이 작가의 캔버스 속 ‘요술공주’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을지 문득 궁금해졌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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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공주는 어느 날 뚝 떨어진 스타일이 아니다. 20년 전쯤으로 거슬러야 하는데, 그때 인형을 그렸던 데서 차츰 변해온 형태다. 지금의 모양이 나온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톡톡 튀는 색깔로 현실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고 할까.”
작가가 말하는 ‘인형’은 비스크 인형을 말한다. 영락없이 사람을 닮은, 1800년대 후반, 1900년대 초반 천재 인형사가 빚어 유래됐다는 그것. “당시 해외여행을 가면 하나씩 사오기도 했던 그 인형을 그렸는데, 그땐 극사실주의와 하이퍼리얼리즘으로도 작업했다.”
처음 안 일이다. 아버지와는 처음부터 다른 세상이려니 했는데 결국 그 한치의 비딱선도 용납치 않는 숨 막히는 세계에서 떨어져나왔다는 얘긴가. “나만의 세상을 찾는 데 갈증이 있었다. 색도 마음대로 못 쓰고 형태도 못 바꾸는 그 작업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말대로다. 비스크 인형의 머리카락 굵기까지 똑같이 그려내던 시절을 마무리하고서야 작가는 점차 변화를 들였다. ‘럭키베어’란 곰인형이 등장한 건 그즈음. 여전히 생긴 그대로를 묘사했지만 곰도 배경도 비로소 작가만의 색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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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 과정을 작가는 ‘도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되레 ‘성숙’이라고 했다. 인형 그림 덕에 일찌감치 기업과 콜래보레이션이 성사된 기회를 두곤 더 그랬다. “2004년 즈음 코리아나화장품의 한 브랜드에 작품 이미지를 입힌 게 최초였다. 10년 정도 이어갔는데 작가의 작업에도 ‘협업’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일찌감치 알았던 셈이다.”
고집만이 능사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후 10여곳의 기업과 콜래보레이션을 진행했다. 최근에는 삼성TV와 홈스타일링 작업을 함께했고, ‘럭키베어’를 평면에서 꺼내 조각으로 옮긴 조형물 3점을 호반건설이 짓는 경기 시흥 신축아파트에 3∼4m 규모로 들이는 일도 하고 있다.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작가에게도 20년 전부터 지금껏 고수하고 있는 게 있다. 뾰족한 칼, 날카로운 송곳 등으로 캔버스에 스크래치를 내는 건데. “석고 등 자재를 섞어 캔버스에 엷게 바르고 덮는 밑작업이 중요하다. 그래야 긁어지니까.”
그렇게 10회 이상 단단한 바탕을 만들고 색을 입힌 다음, 일부러 수없이 상처를 그어내는 균열을 ‘조각한다’. 그림의 흰 선을 색으로 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니. ‘행복그림’에 낱낱이 새긴, 작가 스스로 자처하고 감내한 고통스러운 노동의 흔적은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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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때문에 혹평 받는 건 담아두지 않는다”
대부분 올해 작업들로 전시작 29점을 꾸렸다. 평면 26점은 ‘원더랜드’, 입체 3점은 ‘럭키베어’란 타이틀을 달았는데, 부제는 그때그때 마음이 시키는 대로다. ‘난 희망을 보았어’ ‘이루어질 거야’ ‘게임의 법칙’ ‘행복 비에 젖은 촉촉한 곰들’ 등. 이 작품에 환호하는 주요 구매층 중 한 축에 20대 남성이라는 놀라운 얘기도 귀띔했다. 그들이 핑크그림을 찾고 소녀그림을 사간다고 했다. 그 강력한 팬덤이 작용했는지 작가는 전시에서 종종 ‘솔드아웃’이란 기록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작품이 쉽다고 작업까지 쉽다는 장담을 할 수 있겠나. 혹여 그 지독한 오만 탓에 흔한 오해로 작업을 폄하하는 이들이 없었다곤 못할 거다. 작가의 대답은 단호했다. “취향 때문에 혹평을 받는 건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는 거다. “신경을 쓰는 만큼 작업이 산으로 가지 않겠나. 내 갈 길을 놓친다. 할머니가 돼서도 그릴 그림인데.”
그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365일 작업만 하신다”는 아버지에게서 딸은 제대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단다. 그저 ‘겸손하라’는 당부뿐. 한땐 그 아버지의 극사실주의를 흉내내려 했던 적도 있지만 “이젠 완전히 털어버렸다”고 했다.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았다”고. 다만 그 집요하고 철저한 방식·태도는 물려받기로 한 모양이다. “마흔이 넘으니 저절로 닮아간다는 걸 느낀다. 평생 봐왔던 대로 나도 그렇게 하는 거다.” 전시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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