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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생김새는 제각각이지만 분위기는 비슷했다. 개성으로 살아남은 ‘그들의 행진’이 말이다. 어떤 때는 눈가에 마름모를 세우고 눕힌 어릿광대(‘피에로’ 2010)였다가, 어떤 때는 가지런하게 박힌 하얀 이를 다 드러낸 해골(‘빅스마일’·2017)로 나타났다. 한때는 이마에 잔뜩 주름을 그은 노랑머리 청년(‘러브사우나’ 2011)이었으며, 레게머리 아래 얼굴에 초록·노란색을 반반씩 칠한 원주민(‘태양의 리듬’ 2014)이었더랬다. 어느 날 긴 머리 휘날리는 중성적인 아무개(‘날 그리워 해’·2017)였던 그는, 왕관을 씌운 까만 피부색의 오빠(‘워크 6’ 2017)가 됐고 빨간 단발머리 찰랑이는 센 언니(‘워크 9’·2017)가 되기도 했다. 인종을 넘나들고 성별을 넘나들고, 둥글다가는 뾰족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젠 누구를 데려다 놔도 제법 ‘표’가 난다. ‘하정우의 사람들’이란 게.
배우 하정우(43), 아니 화가 하정우. 2004년 처음 붓을 잡고 2010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국내외 전시에서 꾸준히 작품을 선보였던 터다. 특유의 표정 감춘 인물을 굵은 선과 강렬한 색으로 옮겨놓고 선봬온 자리였다. 짧으면 목 위의 얼굴, 길면 허리 위 상반신만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클로즈업 구도’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한 번 점찍은 대상을 자신의 방식대로 극대화하고 원색의 독특한 색감까지 입혀낸 덕에 그가 캔버스에 가둔 인물은 늘 범상치 않은 주역이 됐다.
◇열네번째 개인전… 2010년 첫 개인전 이후 매해 1~2회씩
그런 그가 다시 개인전을 ‘신고’하고 관람객을 유혹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5길 표갤러리서 연 ‘집에서’(At Home) 전이다. 개인전만 벌써 열네번째. 코로나19가 막아세운 지난해만 건너뛰었을 뿐 2010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 이상씩은 열어왔으니, 웬만한 작가는 저리 가라 할 정도다. 매번 내거는 작품 수도 적잖다. 20∼30점은 기본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35점을 걸었다. 자, 이쯤 되니 그저 배우생활 중 띄엄띄엄 붓을 담그는 취미생활로 볼 게 아닌 거다. 되레 배우란 타이틀이 작가로서의 적절한 평가를 방해하고 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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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선 ‘집에서’란 테마를 십분 활용했다. 펜데믹 상황이 새롭게 발견케 한 ‘집 안’을 들여다본 건데. 덕분에 그간 안 보이던 소재가 제법 눈에 띈다. 양주병을 나란히 세운 ‘키친’(2020), 명품시계 롤렉스를 큼직하게 앉혀둔 ‘초상화 W’(2020), 잎이 푸른 야자수를 송두리째 화분에 들인 ‘워크’(2020) 등등.
그럼에도 시선을 더 오래 붙드는 건 역시 ‘그의 인물’이다. 루이비통·발렌시아가 등 명품옷을 걸친 사내 셋이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버티고 선 ‘저수지의 개들’(2020)이나, 호주 원주민을 연상케 하는 나무로 깎은 듯한 열두 개의 얼굴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배치한 ‘형제들’(2020)이 보인다. 이번 전시를 대표할 ‘얼굴마담’ 격인 인물은 다소 파격적인 설정인데,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슈퍼맨을 코스프레한 남자 ‘슈퍼 실레’(2020)다. 굳이 ‘파격’이라고 한 건 이 남자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1890∼1918)를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레는 자화상을 비롯해 앙상하게 갈비뼈를 드러낸 누드의 남녀상을 즐겨 그려왔던 터. 그런 그를 근육질 영웅으로 변신시켜 놓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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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하정우가 영화나 그림 등 대중문화·예술작품에서 발견한 선 굵은 인물을 화면에 즐겨 옮겨왔던 방식 그대로다. ‘어디서 본 듯한’을 자극하는 건 그 때문이다. 비록 과장과 왜곡이 곁들여진 인물상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됐든 그의 테두리 안에 들어선 순간, 자유롭지 않은 이는 없다.
이번 개인전 외에 하정우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전시도 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시그니처 키친스위트 청담쇼룸에서 열고 있는 단체전 ‘우행’이다. ‘소의 무던한 걸음’을 테마로 한 전시에는 하정우 외에 12명의 작가가 함께한다. 배우 하지원, 가수 구준엽 등 ‘연예인 화가’들을 앞세워 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작가 우국원, 아트놈, 김지희 등이 1∼2점씩 모두 20여점을 걸었다.
6월 19일까지 이어갈 단체전에 하정우는 ‘굳모닝’(2021)을 걸었다. 예의 각진 머리와 턱, 큰 귀와 뿔이 도드라진 푸른 소 그림이다. 개인전의 상당수 작품이 캔버스에 혼합재료를 올린 데 비해 ‘굳모닝’은 종이에 오일·아크릴물감으로 채색했는데. 이번 개인전에 소개한 소재의 확장과 더불어 작가로서 넓어지고 있는 관심영역도 아낌없이 드러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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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선·색 ‘인물’에서 소재·기법 등 변화·확장 중
누구는 피카소가 보인다고 하고, 누구는 장 미셸 바스키아가 보인다고도 한다. 사실 하정우가 그림을 시작할 때 영화 ‘바스키아’(1998)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의 작품에선 ‘그라피티 아트’의 향이 물씬하고 팝아트적 치기가 삐져 나온다.
점차 진화하는 작품세계를 두고 국내 한 미술평론가는 “하정우 그림의 특징은 단순한 선과 묘사에 어울린 선명한 색으로, 굳이 조화를 이루려 하지 않는 조화가 보인다는 점”이라며 “최근에는 다양성과 정교함이 더해져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이제껏 작품활동으로 볼 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라고도 했다.
5월 1일까지 이어지는 개인전을 찾는 관람객 수도 꾸준하다. 주말을 비롯해 평일에도 하루 20여명 예약자 수를 채우고 있다고 표갤러리 관계자는 전한다. 구매로도 바로 연결이 되는 모양이다. 전시작 35점 중 절반이 팔렸다고도 귀띔했다. 작품가는 100호(162.2×130.3㎝) 기준 2000만원 선. 10년 전쯤 1000만원 언저리던 작품가가 2배 오른 셈이다. 팬심이 작동한 애장품으로 한 점씩 구비하던 시절도 지났다. 화랑계 한 관계자는 “그림을 아는 사람이 먼저 관심을 보이고 바로 구매로 이어진다”며 “몇 년 새 컬렉터가 눈독을 들인 작가와 작품이 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정우 작품이라서 사는 게 아니라, 사고 보니 하정우 작품이더란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는 배경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