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더스토리’(INDUSTORY)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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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날개를 단 네덜란드
대항해 시대에 신성로마제국과 로마 교황청의 총애를 받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반(反) 가톨릭계인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동남아시아 무역권을 빼앗겼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동인도 회사를 설립, 동남아 무역 독점권을 부여한다. 하지만 대항해 시대의 패자로서 입지를 굳힌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다.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은 각 영주가 자신이 소유한 영지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명문화했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중세시대는 막을 내리고 국가라는 개념이 생겨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스페인의 압제에도 세계 무역을 주름잡던 네덜란드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끝으로 100년에 걸친 독립전쟁을 마무리 짓고 진정한 독립을 쟁취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해양 패자로 자리를 굳혔을 뿐 아니라 흑사병의 특효약인 육두구 향료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암보이나 학살사건’ 등 야만적 사건을 벌였다. 결국 한때 무역 동맹국이던 영국은 네덜란드를 동반자가 아닌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삼는다. 잉글랜드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영국 공화정을 수립한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 영국의 무역을 영국 배로만 한정하는 강수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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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경 크롬웰 사후 영국은 왕정으로 복귀했으나, 영국 국왕 찰스 2세도 1665년 네덜란드와 전쟁을 시작했다. 1차 영란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데다 네덜란드의 신대륙 식민지였던 뉴 암스테르담을 함락 일보 직전까지 갔던 터라 찰스 2세의 자신감은 상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와 손잡은 네덜란드에 패하고 육두구 산지인 룬 섬과 뉴 암스테르담을 맞바꾸는 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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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넘어선 영국, 금본위제로 금융패권도 거머쥐어
룬 섬과 뉴 암스테르담을 맞바꾸는 거래는 당시로선 네덜란드의 이득처럼 보였다. 룬 섬에서 나는 육두구가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흑사병의 특효약으로 알려지면서 고가에 거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은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이미 환경이 비슷한 그곳에서 육두구를 생산하고 있었다. 룬 섬이 위치한 동남아보다 가까운 남아메리카산 육두구가 유럽에 풀리면서 육두구 가격은 폭락했고 네덜란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또 하나의 변수는 프랑스였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인도 회사로 대항해 시대 무역을 주름잡는 것이 못마땅했던 태양왕 루이 14세는 1664년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세우는 한편, 영국과의 전쟁으로 힘이 빠진 네덜란드를 노린다. 프랑스는 1672년 영국과 ‘도버 밀약’을 맺고 네덜란드를 침공(3차 영란전쟁)한다.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전방위적 공세에 막대한 재산과 인명 피해를 보면서 빠르게 쇄락의 길을 걷는다. 이후 1781년 네덜란드는 4차 영란전쟁에서 영국에 대패하면서 모든 제해권을 영국에 내준다. 한때 세계 무역의 절반을 장악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799년 해체를 선언하고 역사 속으로 쓸쓸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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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가 시작되자 시중에서는 금을 은행에 맡기고 받는 보관증을 현금처럼 사용했다. 이에 은행은 보관한 금 이상의 금 보관증을 복수로 발행하는 방식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의 10배에 달하는 유동성을 창출할 수 있었다.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한 레버리지 효과로 영국은 전례가 없는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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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돛이 없어도 배가 움직인다? 증기선 시대의 도래
바닥을 모르는 막대한 유동자금은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1705년 영국의 발명가 토마스 뉴커먼이 발명한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을 촉발하면서 역사를 바꾸게 된다. 인류는 더 이상 사람이나 가축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도 막대한 에너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이는 물류 수송수단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증기 자동차, 증기 기관차가 속속 등장하는 가운데 마침내 증기기관으로 배를 움직이는 시도가 활발히 이뤄졌다. 1807년 미국의 로버트 풀턴은 배 양 측면에 증기기관을 연결한 물레방아를 장착한 최초의 증기선 ‘클레멘트호’를 선보였다.
돛을 달지 않고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증기선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증기선은 신기한 발명품 정도에 불과했다. 1819년 미국 증기선 ‘사바나호’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 물론 오롯이 증기기관만의 힘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돛을 함께 이용한 ‘기범선’이었지만 증기선도 대양을 오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흥강국 미국의 등장에 영국도 증기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839년 진수한 ‘아르키메데스호’는 최초로 스크루 프로펠러를 도입했다. 당시 증기선은 배의 앞이나 양 옆에 물레방아를 단 외륜 또는 쌍륜선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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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국 정부는 그레이트 브리튼호보다 앞서 비밀리에 증기 철갑선을 개발하고 있었다. 1839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발주로 설계된 ‘네메시스호’는 2개의 증기 엔진을 탑재하고 돛을 달아 풍력과 증기 에너지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네메시스호는 발주자인 영국 동인도 회사가 위치한 인도를 향해 출항했지만 이때까지 네메시스호가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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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 한 척으로 바뀐 역사
당시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인도는 아편을 대량으로 생산해 청나라에 수출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인도산 아편을 사기 위해 많은 은을 지불했고, 인도는 그 은을 영국의 면직물을 사는데 썼다. 즉, 영국은 인도 아편을 이용해 청나라의 은을 빨아들이고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대량의 아편이 청나라에 풀리면서 청나라 국민이 아편에 중독돼갔다는 사실이다. 사회가 마비될 정도로 아편 중독 문제가 커지자 청나라 정부는 강직한 신하 임칙서를 보내 이를 해결하도록 지시했다. 임칙서는 외국 상인들이 보유한 아편 2만여 상자를 바닷물에 녹이는 강수를 뒀다.
영국을 포함한 서양 무역상들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쟁의 승패는 1841년 1월 네메시스호가 주강전투에 투입되면서 허망하게 가려졌다. 청나라 정크선의 포격은 네메시스호의 철갑을 뚫지 못했고, 네메시스호는 조류나 바람에 상관없이 증기기관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초대형 대포로 청나라 해군을 초토화시켰다. 결국 청나라는 1842년 난징조약을 맺고 영국에 홍콩을 할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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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박사는 “아편전쟁 이전부터 영국은 청나라에 홍콩을 할양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버텼다”면서 “하지만 네메시스호의 등장으로 이 모든 힘겨루기는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최첨단 배 한 척이 지닌 전략적 가치는 엄청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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