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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겸의 일본in]19년만 흥행기록 갈아치운 '귀멸의 칼날' 인기몰이 왜?

김보겸 기자I 2021.02.14 03:00:00

멀쩡한 인간도 피 한 방울에 혈귀化
익숙한 소년만화 문법과 클리셰에도
코로나 시국 투영한 듯한 스토리 전개
한일 양국 극장가에서 인기몰이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귀멸의 칼날 포스터.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가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개봉한 데 이어 국내에서도 지난달 개봉했다 (사진=귀멸의 칼날 홈페이지)
소년만화 클리셰 범벅이다. 그러나 오타쿠의 심금을 울린다. 20세기 일본 다이쇼 시대(1912~1926)를 배경으로 하는 액션 활극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이하 귀멸)’ 얘기다.

귀멸은 숯을 구우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사람을 잡아먹는 혈귀에게 가족을 잃고 귀살대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극장판 귀멸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귀살대의 기둥인 주(柱), 염주 렌고쿠 쿄주로다. 배경인 무한열차 안에서 도시락을 수십 개씩 까 먹으며 “맛있다!”를 연발하는 바보 같지만 착한 형이다.

젠이츠(가운데)는 렌고쿠가 귀살대 기둥인 ‘주‘가 아니라 그냥 걸신들린 사람 아니냐고 의심한다. (사진=귀멸의 칼날 홈페이지
첫인상과는 달리 렌고쿠는 엄청나게 강하다. 총 8량의 무한열차에서 5량을 혼자 방어해 200여 명의 승객들을 지키는 데 성공할 정도다. 강한 자에게 열광하는 건 혈귀도 마찬가지인 것일까. 그의 강함에 이끌려 달갑지 않은 자가 찾아온다. 혈귀가 되라는 제안을 하러 십이귀월 중 싸움광으로 꼽히는 상현 3(강함의 정도에 따라 상현과 하현으로 나뉘는 십이귀월에서 3번째로 강하다는 의미다)아카자다. 후반 30분간 이어지는 렌고쿠와 아카자의 전투신을 보기 위해 ‘N차 관람’을 했다는 후기가 줄을 이었다. 극장판 귀멸이 렌고쿠 헌정 영화라는 평이 나올 정도다.

아카자+렌고쿠. 십이귀월 중 세 번째로 강한 아카자는 “혈귀가 되어 나와 평생 싸우자”고 렌고쿠를 설득한다 (사진=귀멸의 칼날 홈페이지)
개봉(지난달 27일) 첫 주에 예매율 60%를 넘은 귀멸은 디즈니 픽사의 ‘소울(당시 예매율 20%)’을 가볍게 누르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2주차인 현재는 소울에 1위를 내줬지만 여전히 열기가 뜨겁다.

극장가를 휩쓰는 인기가 무색할 만큼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이 많다. 영문도 모른 채 탄지로의 일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설정은 ‘데스노트‘의 아마네 미사 가족을 연상시킨다. 인간이었을 당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자포자기한 채 강함만을 추구하는 요괴가 된 아카자는 ‘유유백서’의 도구로와 똑 닮았다. 힘과 젊음만을 사랑하는 사디스트적인 면모는 유유백서에서의 카라스를 떠올리게 한다. “젊고 강한 채로 죽어라”는 아카자의 대사, “늙고 추해지기 전에 내 손으로 죽이겠다”는 카라스의 말과 표현만 다르지 같은 말 아닌가.

인간인 척 하면서 살아가는 최초의 혈귀 무잔 (사진=귀멸의 칼날 tva 에피소드 7 ‘키부츠지 무잔’ 편)
기시감에도 불구하고 어이없을 정도로 강한 혈귀와 한계를 알면서도 맞서 싸우는 인간 귀살대의 대결은 흥미롭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 개봉해 더 그렇다. 혈귀 피를 뒤집어쓴 인간은 혈귀가 되거나 죽는다는 설정, 묘하게 코로나와 겹쳐 보인다. 귀멸의 최종보스인 최초의 혈귀, 키부츠지 무잔은 인간을 혈귀로 만드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인 척 살아가는 무잔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탄지로에게 무언의 경고를 날린다. 지나가는 행인 목덜미를 손톱으로 할퀴는 식이다. 혈귀 무잔에 의해 상처 입은 남성은 영문도 모른 채 감염돼 아내를 공격한다.

무잔 옆을 지나가던 남성은 아무 이유 없이 공격을 받아 혈귀가 된 채 아내를 공격한다 (사진=귀멸의 칼날 tva 에피소드 7 ‘키부츠지 무잔’ 편)
만화에서 피 한 방울로도 멀쩡한 인간이 혈귀가 된다면 현실에선 침방울 하나로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된다. 불과 1년여 만에 전 세계 인구의 1%(약 1억7000만명) 넘는 이들이 감염됐다. 딱히 감염 위험에 노출될 상황을 만들지 않고서도 운 나쁘게 확진자와 접촉해 감염된 사람들이 태반일 터다. 하필이면 무잔 옆을 지나가 혈귀가 돼버린 만화 속 남성처럼 말이다.

치명타를 입혀도 금방 재생되는 혈귀의 특징 역시 코로나와 흡사하다. 기껏 백신을 만들었더니 그새 코로나는 형태를 바꾼 변이 바이러스로 역공에 나섰다. 참으로 막막한 싸움처럼 보이지만 아카자를 향해 탄지로는 외친다. “혈귀에 비하면 인간은 재생도 느리고 잃어버린 팔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현실의 인류도 마찬가지다. 유례없는 바이러스의 등장에 지난 2020년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표현대로 “생명이 위태로운 한 해”였다. 그러나 동시에 바이러스 퇴치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인류가 반격에 나선 해였다. 사이언스지는 “그토록 많은 경쟁자들이 이번처럼 공개적으로 협력한 적이 없었다”며 “정부와 산업계, 학계와 비영리 기구들이 코로나에 대항해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돈과 힘과 지혜를 모은 적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혈귀가 되라는 아카자의 제안을 거절하며 렌고쿠는 말한다. “늙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이라는 덧없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지,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소중한지 돌아보게 만드는 코로나의 교훈과도 맞닿아 있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19년 동안 깨지지 않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흥행 대기록을 귀멸이 갈아치운 데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인간이 말도 안 되게 강한 존재와 맞서 싸우는 이 이야기에 어느새 푹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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