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어느 날. 월간지 ‘비즈니스코리아’에서 막 수습생활을 시작한 초짜 기자 손지애는 이를 악물었다. 당시만 해도 남자들 일색인 기자 사회에서 편견을 깨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텼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도 밀려왔지만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어느덧 회사에서 ‘이건 손지애 기자에게 맡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정성을 쏟고 책임감 있게 일 처리를 하다 보니 성과를 내기 시작했죠. (능력을 보여주니) ‘남성들도 그렇게 관계의 벽이 닫혀 있지 않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선택지 없는 워킹맘, ‘해내겠다’라는 의지 갖춰라”
“일과 가사를 병행하는 건 쉽지 않아요. 포기를 쉽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거죠.”
사람들은 ‘손지애’라는 이름을 들으면 주로 ‘영어를 잘해 성공한 여성’을 떠올릴 법하다. ‘일벌레’나 ‘독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손 전 사장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손사래를 친다. 그들은 손 전 사장이야말로 ‘자상한 엄마’나 ‘참한 맏며느리’의 표본이라고 얘기한다.
사실 손 전 사장은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1년에 제사를 일곱 번이나 치르는 맏며느리다. 결혼 후 25년간 시부모를 모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8년에는 ‘관악효부상’도 받았다.
“지금까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도움이 컸죠. 일차적으로는 인생의 파트너인 남편의 도움이 가장 컸고요. 시집이나 친정 등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을 찾아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청했죠.” 맞닥뜨린 어려움을 홀로 극복하지 말고 주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게 손 전 사장의 생각이다.
“관계의 힘은 ‘맺음’에서도 나오지만 ‘끊음’에서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관계를) 내려놓을 때는 과감하게 내려놔야 하죠.”
손 전 사장은 사실 기자 초년병 시절에는 모든 사람과 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고 한다. 상대와 껄끄럽게 지낸다거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 먼저 손도 내밀었다. 그러나 40대를 넘어서면서 ‘노력을 해도 안되는 게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서로 맞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관계의 끈을 쥐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일까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도 저 자신을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끊음에서도 분명히 배울 게 있다’고 강조한 손 전 사장은 “과거 기자 시절 한 선배가 ‘자신을 판단하는 방법의 하나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며 “연륜이 쌓이면서 그 조언을 이해하게 됐고, 제 인생에서 썩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후회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그녀에게 값싼 질문 하나를 던졌다.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손 전 사장은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무엇이 됐든 진심이 배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상대방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 사람이 무엇에 관심이 많은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등등이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작은 선물을 하기도 하고, 그 사람의 배우자에게 생일 축하 한마디를 건네기도 하죠. 사람은 원래 작은 것에 감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아리랑TV 사장 시절 ‘따듯한 리더십’의 대명사로 불렸다. 손 전 사장은 “리더십의 궁극적인 목표는 조직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그런 생각으로 경영을 하다 보니 직원들도 신이나게 됐고, 그 결과 더 좋은 성과를 낸 것 같다”고 회고했다.
손 전 사장은 야심을 드러내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잘못된 편견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과거 정말 열심히 일하던 여성 후배 한 명이 찾아와 ‘돈에만 눈이 멀었다’는 남성 동료의 이야기를 엿듣고는 속상해한 적이 있었어요. 그 후배는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일만 해왔을 뿐인데 말이죠. 이건 남성들이 고쳐야 할 잘못된 시각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