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칼만 휘두른 것만은 아니다. 기업의 자발적 변화를 강조하는 베스트프랙틱스(모범관행·Best Practice)도 병행했다. 법, 시행령 등을 통한 규제인 경성규범(hard law)뿐만 아니라 상생협약 등 연성규범(soft law)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4대, 10대 그룹과 수차례 간담회를 하면서 자발적인 지배구조 개편 및 불공정행위 차단을 유도했다.
4대 그룹 한 관계자는 “공정위가 강하게 칼을 휘두르고, 전문경영인(CEO)을 불러 압박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소통을 통해 공정위가 경제 현실에 유연성을 갖고 개혁을 추진했다는 느낌도 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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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의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삼성, 롯데, 현대중공업, 대림, 현대백화점 등 5개 집단이 순환출자를 완전 해소했다. LG그룹은 선제적으로 계열사의 총수일가 지분을 매각하면서 사익편취 우려를 해소했다.
지주회사 전환이나 정비도 활발했다. 효성, 현대산업개발은 지주회사 전환을 완료했고, 거미줄처럼 지배구조가 복잡했던 롯데 역시 지주회사로 전환했다. 사외이사 선임 등 지배주주나 경영진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보다 확대됐고, 소액주주를 위한 전자투표제 도입도 활발했다. 기업들도 ‘글로벌 트렌드’에 부합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정경제 최종 종착지는 법개정이었다. 일부 기업들의 자발적 개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아래에서 재계의 강한 반대에도 정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법개정을 강행했다.
공정거래법 전부 개정으로 일감몰아주기 규제망은 보다 넓어졌다. 총수일가 지분율이 20%이상인 계열사와 이들이 지분을 50% 넘게 보유한 자회사는 일률적으로 공정위 규제 칼날 앞에 서게 됐다. 신규 지주회사는 앞으로 자회사의 의무지분율을 20%에서 30%로 끌어올려야 한다. 자회사 지분율을 끌어 올리면 세제 혜택을 받는 당근책으론 한계가 있다는 인식하에 채찍을 꺼내든 것이다.
그러나 당장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편은 복잡해졌다. SK그룹의 지배 구조는 오너→SK→SK텔레콤→SK하이닉스로 이어지는데, SK텔레콤을 중간지주사로 변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SK하이닉스에 대한 SK텔레콤의 지분율은 20% 수준인데 올해를 넘기면 9조 원을 들여 지분 10%를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한다.
IT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자산 5조원을 넘겨 대기업집단에 오른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계열사 누락혐의로 검찰 고발까지 당했다. 과거 재벌과 같은 지배력 확장을 위한 내부거래도 없었지만, 다른 재벌과 똑같은 잣대를 들이댔다. 올해 자산 10조가 넘을 가능성이 큰 네이버는 △상호출자금지 △채무보증제한 △금융보험사의 의결권 제한 규제도 추가로 받게 된다.
이처럼 1986년 신설된 재벌 규제는 근본적인 변화 없이 계속 강화만 되고 있는 추세다. ‘풍선효과’처럼 규제망에서 벗어나는 기업을 올가미에 넣기 위해서는 새로운 규제가 필요하다는 논리이지만, 기업마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재벌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주진열 부산대 법학전문대학 교수는 “우리나라 공정거래법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재벌 규제다”면서 “현실이나 이론과 맞지 않는 부분은 점진적으로 완화 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전세계에서 기업 규모가 크다고 규제하는 나라는 없다”면서 “기업 덩치 크다는 이유로 대기업집단 지정해서 일률적인 규제를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 교수도 “법개정만 하면 다 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면서 “지난 4년간 재벌정책을 다시 돌이켜보고, 법개정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을지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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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정책과 함께 양축으로 진행된 ‘갑을 개혁’도 변곡점을 맞고 있다. ‘을의 눈물을 닦겠다’면서 가맹, 유통, 대리점 갑질 개혁에 적극 나섰지만, 공정위는 현재 심각한 ‘민원처리’에 시달리고 있다. 민사로 해결돼야 할 사항이 상당한데도 공정위가 이를 모두 떠맡으면서 정작 시장에 중요한 시그널을 줄 수 있는 주요 사건 처리는 더뎌지고 있다.
이봉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 교수는 “공정위가 쏟아지는 갑을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시, 경기도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있긴 하지만 지자체에서는 공정위가 적극적으로 권한 분산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다”면서 “공정한 거래질서를 저해할 우려가 미미한 사건은 처음부터 공정위 사건처리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