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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비운의 퍼스트레이디에서 대한민국 첫 여성대통령까지

이도형 기자I 2012.12.20 06:00:00
[이데일리 이도형 기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18대 대통령선거의 주인공이 됐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헌정 사상 첫 부녀 대통령의룬 것. 지난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며 정치에 입문한 이래 15년 만에 얻은 ‘대권’이다.

콘텐츠없이 아버지의 후광만으로 정치를 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지만, 고비 때마다 여권의 구원투수로 본인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개인사적으로는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은 비운의 퍼스트레이디였다.

◇대통령의 딸... 평범했던 학창시절

박 당선자는 1952년 2월 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박 당선자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버지(박정희) 36세, 어머니(육영수) 28세의 좀 늦은 나이에 본 첫 딸이어서 두 분 모두 애정이 깊으셨다”며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나를 씻기는 일로 하루의 피로를 잊으셨다고 한다”고 회고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전 집을 나가려던 박정희는 육영수의 “근혜 숙제 좀 봐주세요”라는 말에 박 당선자를 잠시 본 뒤 떠나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당시에 대해 “저를 한 번 보고 나가신 건 기억하는데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그는 중학교 시절까지는 통학 거리등의 이유로 신당동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다녔다. 성심여중 재학 중 1년 동안은 기숙사 생활을 경험했다.

그는 성심여고를 거쳐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박 당선자는 청와대 생활에 대해 “혜택을 누린 점도 있을 것이지만 어린 내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며 “어머니(육영수 여사)가 자식들이 평범하게 성장하도록 배려해 무리 없이 사춘기를 지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그는 데모하다 퇴교당한 과 친구의 소식을 듣고 육 여사를 통해 복교와 취직을 도와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을 수석 졸업한 그는 곧바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22세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은둔의 18년

그는 1974년 8월 15일 육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해 숨지자 급거 귀국해야 했다. 당시 심정에 대해 박 당선자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심장을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고 표현했다.

육 여사의 뒤를 이어 그는 22살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를 맡았다. 청와대 안살림을 도맡으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정을 수행했다. 그는 당시에 대해 ‘입술이 부르트고 항상 미열을 안고 산 삶’이었지만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박 당선자는 아침마다 박 전 대통령에게 신문을 읽어주면서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5년여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뒤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다. 다음날 새벽에 소식을 들은 박 당선자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전방은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박 당선자는 당시의 심정에 대해 ‘온 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아흐레 간의 국상 뒤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집으로 옮겼고 이어 성북동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후 1997년까지 간간히 방송 등에 출연할 뿐 대중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기간동안 육영재단을 맡았고 영남대학교와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동시에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고 각종 서적을 탐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내용이 담긴 ‘겨례의 지도자’라는 책과 ‘조국의 등불’이라는 영화를 만든 시기도 이때다.

◇IMF 외환위기에 정치입문... 與 구원투수

그는 IMF 외환위기 중에 치러진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에 대한 찬조연설에 나서며 정치계에 입문한다. 그는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가”며 “다시 나라가 반석위에 올라서는데 일조를 하고 노력을 안 한다면 나중에 굉장히 스스로를 자책할 것 같았다”고 동기를 설명했다. 그는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여의도에 입성, 이후 내리 5선을 지냈다.

2000년에 당 총재에 당선됐지만 개혁안에 대한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탈당한 뒤 2002년 5월에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 기간에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기도 했다.

2002년 대선 직전 복당한 그가 정치적으로 크게 도약한 계기는 2004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존폐 위기에 몰려 있던 한나라당호(號)의 선장을 맡아 ‘천막당사’ 등 각고의 노력으로 121석을 확보하는 반전을 이뤘다. 그는 2년 6개월 동안 당 대표를 역임하면서 연이은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선거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유세 도중 당한 테러 뒤 ‘대전은요?’라는 말로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 광역단체장 석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그는 이명박 현 대통령에게 근소한 차이로 석패하면서 분루를 삼킨다. 박 당선자는 패배에 깨끗이 승복하고 이 대통령을 지원해 ‘아름다운 패배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대권 재수 끝에 마침내 18대 대통령

박 당선자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여러 차례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18대 총선 당시에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며 친이계와 정면 대립했다.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맞서 본회의장에서 직접 연설을 하며 원안을 고수했다. 미디어법 통과 등에서 소극적인 처신으로 야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국민은 그를 ‘여당 내 야당’으로 평가했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참패 등으로 당이 위기에 처하자 다시 전면에 나섰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고, 당명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김종인·이상돈 ·이준석 등 중도적 인사들을 대재적으로 영입하며 쇄신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선거전 초반 부정적 여론을 극복하고 152석으로 1당을 차지했다.

그는 지난 7월 10일 “국민 한분 한분의 꿈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8월 20일에 84%라는 압도적인 당내 지지로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박 당선자는 줄곧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에게 박빙 우위를 지키며 대선 레이스를 달려왔다.

중간 중간 과거사 논란·정수장학회 문제·경제민주화 갈등 등의 악재가 돌출되었지만 지지율은 크게 출렁거리지 않았다. 마지막 고비였던 문재인·안철수간 단일화도 박 당선자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정치 입문 15년 만에 대통령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이제 5년이 그에게 주어졌다. 박 당선자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소망이라는 ‘모두가 작은 행복이라도 이루고 사는 대한민국’을 아낌없이 만들어볼 기회다.

박근혜 당선자 프로필

1952 2.2 대구 출생

1958 장충초등학교 입학

1964 성심여자중학교 입학

1967 성심여자고등학교 입학

1970 서강대 전자공학과 입학

1974 서강대 전자공학과 수석졸업

1974 8. 15 프랑스 유학중 육영수 여사 사망으로 급거 귀국

1979 10. 26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1980~1988 영남대학교 이사

1982~1990 육영재단 이사장

1994~2005 정수장학회 이사장

1998~2012 제 15·16·17·18·19대 국회의원

1998~2002 한나라당 부총재

2002.5~2002.11 한국미래연합 최고위원

2004.3~2006.6 한나라당 대표 최고위원

2007 한나라당 17대 대통령 경선 후보

2011.12~2012.5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2012.7.10 18대 대통령선거 출마선언

2012.8.20 새누리당 대선후보 선출

2012.9.24 과거사 관련 기자회견

2012.12.19 18대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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