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난 극작가 배삼식(54)은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국립창극단 ‘리어’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연극으로 각색했다면 무척 힘들었겠지만, 창극으로 각색하는 것은 음악을 활용할 수 있어 즐거운 작업이었다”라며 “‘리어’는 공연을 하면 할수록 음악을 통해 좋아질 부분이 많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가 묻어났다.
◇창극으로 참신하게 재창조…전석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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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작가는 우리 말의 맛을 살리는데 탁월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국립창극단과는 2016년 그리스 비극 원작의 ‘트로이의 여인들’로 함께 작업했다. ‘리어’에서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중국 사상가 노자의 ‘물의 철학’으로 풀어냈다. 배 작가는 원작을 보면서 ‘천지불인’(天地不仁, 세상은 어질지 않다)이라는 노자의 말을 떠올렸다. 실제 공연에선 20톤에 달하는 물을 무대 바닥에 설치해 인물의 내면을 표현한다.
“셰익스피어처럼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딘 고전을 각색할 땐 원작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작업합니다. ‘리어왕’은 희망이 없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의 ‘사필귀정’을 보여줍니다. 한 존재가 끝없이 불타올랐다 스러져 무(無)로 돌아가는 과정이죠. 주인공 리어는 기운 없이 저수지에 고여 있는 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잔잔하다가 거칠게 싸우며 할퀴고, 떨어져 내려가고 역류도 하는 물의 이미지가 리어의 삶 그 자체라 생각했습니다.”
작품은 셰익스피어 비극 중 가장 절망적이다. 늙고 병든 왕 리어가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눠주기로 결심하지만, 딸들에게 버림받고 미쳐버린다. 유일하게 아버지를 진심으로 대한 막내 코딜리어마저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리어를 충실하게 따르는 글로스터 백작 또한 서자인 둘째 아들 에드먼드의 음모로 위기에 내몰린다. 꿈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다.
◇특유의 관조적 시선 반영…여운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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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는 교훈적인 이야기는 아니에요. 욕망이 투영된 선과 악을 보여줄 뿐이죠.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었을 때, 그게 사실은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죠. 선악을 가르는 건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형상이라고 봐요. 관객 또한 작품을 보면서 각자 느끼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배 작가는 서울대 인류학과를 전공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극작과 전문사를 나왔다. 배 작가의 작품이 보여주는 관조적인 태도는 인류학의 영향이기도 하다. “인류학에서는 자신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공동체와 접촉했을 때, 그 접촉 자체가 대상을 변화시킨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요. 어떤 대상을 완벽하게 파악한다고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어떤 사태를 파악할 때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며,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생각을 인류학에서 배운 것 같아요.”
‘리어’는 오는 10월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영국 공연을 예정하고 있다. 앞서 ‘트로이의 여인들’은 지난해 영국에서 공연해 현지에서 호평받았다. 배 작가는 “비극이 지닌 페이소스를 전달하는데 창극만큼 효과적인 형식도 없다”며 “셰익스피어 작품과 창극의 만남에 영국 관객이 보여줄 반응도 기대가 크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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