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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0분쯤 늦을 거라 귀띔한다. “연로한 노화백이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얼핏 상상이 안 됐다. 그 쟁쟁하던 분이 정말 그럴까. 결국 10분을 넘겨서야 화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입장이 단순치 않다. 휠체어에 앉은 채였으니까. 긴 지팡이까지 어깻죽지에 걸치고.
분위기를 감지한 건가. 첫마디부터 무게가 실렸다. “내가 숨기고 싶었던, 내가 살아온 과정을 다 드러낸 전시다. 발가벗고 선 입장이다. 사실 내가 발가벗은 것보다 그림이 발가벗은 게 더 아름다울 텐데. 난 이제 근육이 다 빠져나가고 배만 볼록한 노인이 됐으니.”
박서보(88). 그가 누구던가.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거장으로 불려온 이다. 그를 빼놓고 한국의 현대미술을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국내 최초 앵포르멜(2차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운동. 작가의 즉흥적 행위·감정을 중시하는 추상미술) 작가로 이름을 올리며 한국미술의 흐름을 틀고 비틀더니, 1990년대 중반 이후 ‘단색화’ 바람을 타고서는 그 기둥이 됐다. 교육가로 행정가로 평론가로 활약한 것도 모자라 한 점당 수억원을 호가하는 단색조 대표작가로도 우뚝 섰다. 화단에선 무서울 게 없던 그였다. 그런데 세월은 어찌하지 못했나 보다.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는 ‘연로한 노화백’으로 우리 앞에 나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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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대규모 회고전으로 마련한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 개막 이후 한 달 남짓, 거장이 일생을 활활 태운 70여년 화업을 경외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50∼1960년대 구상·추상 초기작, 한국식 앵포르멜 회화로 전쟁의 상흔과 불안·고독의 정서를 내보인 ‘원형질’시대, 옵아트·팝아트를 수용한 기하학적 추상에 한국 전통색을 띄워 물질-추상의 관계를 밝힌 ‘유전질’시대를 잇는다. 이후는 1970년대부터 평생을 품어온 ‘묘법’ 시리즈다. 연필로 수없이 그어댄 선긋기를 거쳐 닥종이 등 한지물성을 색감으로 극대화한 ‘지난한 노동’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냈다. 160여점을 걸었다. 그저 수행자처럼 걸어온 인생그림이다. 지치지도 않고 지칠 겨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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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추상미술 선구자가 쓴 ‘반골의 역사’
“수많은 일을 겪었다. 자다가 중앙정보부가 있던 남산에 끌려가기도 하고. 하지만 한 번도 굴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 앞에서 도도하게 내 생각을 펼쳐왔다.” 말이 쉽지, 이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린 안다. 빛이고 그늘인 삶. 전쟁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동료작가들이 하나둘 사라져 갈 때도, 반정부작가로 낙인찍히고 매장당할 때도, 남들이 인정하지 못하는 화풍으로 이단아 취급을 받을 때도, 길을 놓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1956년 반(反)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선언하며 화가 김영환·김충선·문우식과 의기투합해 독립전을 이끌었던 게 그 한 단면.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술상에 ‘초짜화가’가 정면으로 대든 ‘괘씸한 사건’이었다. 이때 나온 작품이 ‘회화 No.1’(1957)이다. 한국의 첫 앵포르멜 작품으로 기록됐던 이 그림이 이번 전시에 나왔다. 첫 공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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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의 ‘반골’기질은 홍익대 교수 시절 도드라졌다. “미술시간에 화병과 꽃·사과·명태 놓고 그리라는 교육으론 절대 좋은 작가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뻔한 미술교육에 반하며 홍대 미대 개혁의 선봉에 섰던 셈인데. 당장 미운털이 박혔다. “더러워서 사표를 냈다.” 1966년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화백의 일생을 바꿨다. 호기롭게 사표는 냈는데 아득하더란다. 경제사정도 그랬지만 ‘화가의 고민’도 시작됐으니. “그동안 해온 게 뭐냐. 서양 애들의 회화이론을 짜깁기하고 있었던 거 아니냐.” 자신에 대한 매질을 시작한 셈이다. 불경·노자·장자 안 읽은 게 없다던 그 시절 끝에 결국 다다른 지점은 여기다. “결국 나를 비워내야 하겠더라. 캔버스를 비우자. 그래야 다른 사람이 와서 쉬어갈 수도 있고.”
그런데 도대체 방법을 모르겠더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작은 아들이 방한지 노트에 한글을 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단다. 글자가 작은 네모 안에 제대로 안 들어가는 게 짜증이 났던지 마구 긋다가 내던져버리는 그 모습이. 아차, 했다. 내가 찾던 게 저기 있구나. 일생을 고민하고 탐닉해온 ‘묘법’이 탄생하던 순간이다. 화백이 “연필을 가지고 날 비워나가는 작업”이라 했던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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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초입에 걸린, 올해 어렵게 완성했다는 대작 ‘묘법 No.190227’ ‘묘법 No.190411’ 두 점은 그때 이후 반세기를 더듬어온 역작이다. 빗질로 그어낸 듯한 분홍·회색 바탕에 유백색 물감을 얹고 마르기 전에 연필로 무수히 그었다.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 이뤄낸 작품이다. 그 앞에서 화백은 돈 보따리를 던져줘도 팔지 않을 거란 한마디로 차마 더 풀어내지 못한 지난 과거를 에둘렀다.
△치열한 ‘독종’이 미리 써둔 묘비명
단연 ‘묘법’이 중심이지만 전시는 회고전답다. 초기 구상·앵포르멜 작업부터 중기 ‘원형질’ ‘유전질’ 연작에까지 고르게 할애했다. 박서보스럽지 않은 파격적인 설치작품 한 점도 눈에 띈다. 육체는 빠져나가고 육체를 감싸던 외피만 남긴 인물군상이 붉은 조명과 어우러진 작품. ‘허의 공간’(1970·2019 다시 제작)이다. 절친이던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제안으로 만들어 1970년 일본 오사카엑스포 한국관에 세웠더랬다. 전시기간을 채우지도 못했다. 반정부기질이 보인다 해 도중 철거됐던 거다. 49년 만의 귀환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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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을 두고 후대는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라 말한다. 평생 꿈틀거렸으니, 지키고 바꿨으니, 전통을 부수지 않은 혁신을 끊임없이 꾀했으니. 하지만 이 때문에 발목이 잡히기도 했다. 1970년 교수직에 복직한 뒤 미술계에 고질적 병폐가 된 ‘홍익대 사단’을 단단히 굳힌 인물로 비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나와 같이 출발한 친구들이 사라져갔다. 그 유능한 작가들이 중도에 다 실패하고 나 같은 독종만 살아남았다. 끝까지 물고 있어서 성공한 거다.” 맞다. 달리 어찌 설명해낼 건가.
일생 품어왔다는 좌우명이 철학으로, 글로, 그림으로 전시장 곳곳에 배어 있다.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그 또한 추락한다.’ 아마도 그는 이 명제를 영원히 품고 갈 작정인가 보다. “오래 살 것 같지 않아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는데, 이 문구를 내 비석에 적으려 한다.” 전시는 9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