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스쿨대디의 '아빠의 커닝 페이퍼'

류성 기자I 2019.03.31 07:00:00

19세기 학교, 20세기 교사, 21세기 학생

[홈스쿨대디 김용성 교수] 갈수록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사회가 남성중심적이라고 하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이제 드라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지요. 아내와 자식에게 호통치던 대발이 아버지는 사라지고 우스꽝스러운 야동순재 이미지만 남았습니다. 저 또한 아버지로서 풀죽은 아버지들의 모습에 서글픔을 느낍니다.

홈스쿨 대디 김용성 교수
아버지가 가정의 리더로서 존재감과 존경심을 되찾는 것은 아버지 자신은 물론 가족 전체에도 도움이 됩니다. 자녀들이 관찰하고 배울 수 있는 어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학교를 보세요. 남자 교사가 워낙 드물어서 초등학교는 이미 여인천하가 되었답니다. 게다가 학부모 모임을 하면 대부분 엄마가 참석하기 때문에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만나는 어른은 대부분 여성입니다. 양성 균형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건 그다지 좋은 교육환경이라 할 수 없지요.

그래서 필자는 본 칼럼을 통해 아빠들의 존재감 회복 프로젝트, 이른바 아빠의 커닝 페이퍼를 제안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아빠들에게 유용한 아이디어를 찾아서 함께 배우자는 거지요. 저는 초,중,고생 아들 세 명을 키우고 있습니다. 셋 다 학교에 가지않고 집에서 공부하는 홈스쿨러들이지요.

홈스쿨링 경력이 7년차에 이르니 이제는 세 아들이 자율적으로 생활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가정은 갖가지 경험과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홈스쿨링을 통해 아들보다 제가 더 많이 배운 듯합니다. 특히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말이지요. 이번 칼럼에서는 그중 한 가지를 나누겠습니다.

예전에는 할아버지들의 존재감이 정말 확실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생활비를 넉넉히 벌어오지 못해도 가족 중 아무도 감히 할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남존여비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가정에서 핵심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조상님을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의 역할입니다. 제사를 통해 조상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린다는 점에서 할아버지는 가정의 정신적 지주, 종교적 사제였습니다. 할머니가 일상을 챙기고 물질적 세계를 담당하셨다면 할아버지는 제사로 표현되는 정신적 세계를 담당하셨다고 할 수 있지요.

요즘은 많은 가정이 약식으로 제사를 드리거나 추도식으로 대신합니다. 명절이면 온 가정이 해외여행을 떠나지요. 그 바람에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는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잃고 생활비 조달자의 역할만 담당합니다.

생활비 조달자 역할이 강조될수록 아버지들은 월급의 크기가 의미하는 바가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존경받고 돈을 적게 벌면 무시당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거지요. 슬픕니다. 일반적인 직장인 월급으로 두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를 치르고나면 저축할 돈도 거의 남질 않는데 말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런 난관을 돌파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가정에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해서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복원한 거지요. 아직 완벽한 성공을 이루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부분 가정의 존경을 얻는데 성공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많은 가정이 중요하게 여기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배제되는 영역이 자녀교육입니다.

저는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홈스쿨링을 시작하기 전에 공교육이란 무엇이고 언제 시작했는지 공부했지요. 공교육은 1794년, 지금 독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센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럽국가들은 산업혁명을 시작한 영국을 보며 부러워했지요.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프로이센은 산업역군을 대량으로 만들어낼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당시 공장주들 사이에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노동자와 관리자의 수요가 컸기 때문이지요.

프로이센 공교육은 읽기, 쓰기 능력에 더불어 시간표에 맞추어 등교하고 수업시간 내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지시 받은대로 공부하는 규율을 강조했습니다. 그 학생들이 자라서 시간표에 맞추어 출근하고 근무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지시받은 작업을 수행하는 노동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간단히 말해, 초기 공교육의 목표는 ‘순종적인 공장노동자의 대량생산’이었습니다.

그 흔적은 지금도 학교에 남아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등교하는 학교 건물을 보면 공장처럼 보입니다. 건축가 유현준씨는 담장에 둘러싸인 학교 건물이 교도소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보니 그렇게 보입니다.

학교의 운영방식은 공장과 닮았습니다. 한 해의 1월1일부터 12월 31일 사이에 태어난 학생들은 한 학년이 됩니다. 공장에서 제조연도 기준으로 제품을 분류하는 것처럼요. 교사들은 통합교육을 하는 대신 국어, 수학, 사회, 과학 등으로 과목을 구분해서 가르칩니다. 전형적인 공장의 분업방식을 따르는 거지요.

균일한 품질의 학생을 대량생산하는 지금의 공교육이 산업화 시대에는 적합할 것입니다. 하지만, 2차와 3차를 지나 4차 산업혁명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사회에서 공장형 공교육은 시대착오입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공교육 회의론이 빠르게 퍼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의 학교는 정답이 아닙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눈을 돌려 대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만약 아들이 제게 한국의 공교육에서 무엇이 잘못 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을 재우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요. 아들이 아빠의 통찰에 감탄하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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