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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블루칩’이란 말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아는가. 옛날 옛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중세 르네상스시대. 문화의 황금기로 걸작들이 쏟아졌던 시절이지만 당시 물감은 아주 비쌌다. 특히 파란색이 그랬다. 구하기도 힘들 뿐더러 귀중한 특산물이었다는데. 바로 블루칩이 유래한 배경이다. 언감생심 눈독 들이기도 불경스러울 정도여서 도박장에선 블루칩이 가장 비쌌고, 주식시장에서도 가장 비싼 주식을 블루칩이라 부르게 됐다는 거다.
그런데 말이다. 그 파란색을 ‘판타스틱’하게 썼던 화가가 있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1696∼1770)라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16세기 로코코회화의 전형을 보여줬던 그의 장기는 가벼운 분위기와 환상적인 세부묘사.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무중력상태의 인물들을 떠올린다면 어렵지 않게 연상될 거다. 어쨌든 그는 어떻게 그 비싼 파란색을 숭덩숭덩 써댔을까. 투명하다 못해 은빛이 감도는 청명한 푸른색이란 극찬을 받으며 말이다.
결론적으론 이거다. 부채의 구조에 여유가 있으면 화가의 뇌에도 여유가 생긴다는 것. 티에폴로의 천재성을 더욱 ‘푸르게’ 만든 베네치아화풍은 유난스러운 열정이 아닌 덜 유난스러운 부채 덕이었단 거다. 경제적으로 시달리면 시간적 여유는 물론이고 일단 뇌의 여유가 없어지기 마련이니까.
멀리 중세 베네치아로까지 날아가 대한민국 경제의 ‘뇌관’인 부채문제의 해결책을 찾은 이는 오랜 시간 경제·금융·기업관계를 연구해온 저자다. 미국 글로벌금융혁신연구원장으로 정책자문과 비즈니스 컨설팅을 한다.
△살빼기만큼 부채 줄이기 어려운 이유
‘부채가 뭔가’에 대답할 수 있다면 부채문제의 90%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논지의 축이다. 그중 하나가 ‘세 번은 짧게 한 번은 길게 그리고 빡빡하게’란 패턴을 이해하는 거다. 누군가 단칼에 부채문제를 끊겠다고 큰소리를 친다면 100% 사기꾼이라고 했다. 왜 완전해결이 안 되는가. 대출규제를 강화하면 부채를 줄일 수 있지 않나. 부채탕감은? 이 모든 궁금증의 답이 ‘글쎄요’인 건 부채가 살아 있기 때문이란다. 끊임없이 변신하고,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부채를 부르기 마련이라서다. 부채 빼기가 살 빼기만큼 힘든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근본 원인을 치유하지 못하면 다시 원래로 돌아가는 건 시간문제다. 요요현상처럼.
방법이 있기는 한가. 있다. ‘트릴레마’(trillemma)란다. 트릴레마는 3가지 목표가 상충하는 걸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목표를 이루려다 보면 다른 두 가지 목표는 포기해야 하는 상태에 이른다는 거다. 2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보다 더 꼬인 국면이다. 그렇다면 왜 트릴레마인가. 부채라는 게 복잡한 구조라 늘 트릴레마로 덤벼들게 돼 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그나마 해결책이 보인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가장 방점을 둔 것은 학자금부채다. 모든 부채의 발단이라고 확신한다. 졸업 후 사회로 나온 청년들이 극심한 취업난에 저신용·고금리·신용불량의 악순환에 빠지고, 그로인해 가계부채는 누적되고 국가부채는 눈덩이가 되니까. 한국은행이 얼마 전 발표한 ‘2017년 4분기 가계신용’만 봐도 그렇다. 지난해 말 가계신용 잔액은 1450조 9000억원. 전년보다 108조 4000억원(8.1%)이 증가해 2002년 통계를 낸 이후 최대치를 찍었다. 가계신용은 가계부채를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통계다. 은행·저축은행·대부업체 등에서 받은 대출과 결제 전 신용카드사용금액을 합쳐 산출한다. 한 해에 100조원이 넘게 불어난 가계빚. 게다가 30대 이하 젊은층이 짊어진 청년부채가 지난해 가계대출 증가액의 60%라니.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90%가 넘는 가계빚이 국가부채를 압박하는 건 수순인 거다. 결국 학자금부채는 다음 경제위기를 가져올 뇌관인 셈이다.
△부채 뇌관, 지분과 주식으로 해결한다
저자의 논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개념이 있다. ‘빡빡한 부채’와 ‘빡빡하지 않은 부채’ 혹은 ‘융통성 있는 부채’. 저자가 부채문제 해결을 찾아가는 데 끊임없이 반복해 놓은 징검다리다.
가령 저자가 가장 걱정하는 학자금부채를 보자. 거칠게 말해 학자금부채는 이런 형국이다. 대학교육이란 트릴레마에 빠진 구조. 정부부채도 한계가 있고 가계부채도 한계가 있는데, 그런 중에도 대학교육은 늘려야 하는 트릴레마. 그러니 학자금대출은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될 수밖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전통적인 ‘빡빡한’ 부채에만 국한해 학자금조달을 생각하면 해법이 안 나온다는 거다. 저자가 제시한 해답은 딱 하나뿐이다. ‘융통성 있는 부채’다. 부채란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 ‘부채 패러다임’을 ‘지분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보완화폐’를 도입하는 거다. 그러곤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세상을 지배해온 ‘빡빡한 부채’가 330여년 만에 처음 도전을 받고 있다”고 했다.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핵심은 한 마디로 이렇다. “부채를 개혁하자!” 어떻게? ‘융통성 있고 민감하게’ 부채를 변화시키자는 거다. 학자금부채라면 개혁입법화부터 서둘러 추진하자고 주장한다. 젊은이들에게 빚을 지워 사회에 내보내는 건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소득과 위험을 나누는 ‘소득나눔 학자금’이라면 ‘정의롭고 아름답고 자연스럽기’까지 하다고. 여기에 국가부채라면 ‘국가주식’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고 했다. 부채를 지분과 주식으로 전환한다는 ‘파격’을 꺼낸 셈이다.
‘소득나눔’ ‘국가주식’을 얼마나 열심히 강조했는지 도입부부터 가운데 토막까지 줄기차게 반복 또 반복이다. ‘딱 한 번만 더’에 이르면 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는. 어쨌든 이 역설에 탄력을 받았는지 정부의 ‘2018 경제정책 방향’은 실제로 ‘소득나눔 학자금’을 포함시켰다. 이런 방식이다. 원리금 100%를 반드시 갚아야 하는 대출형태가 아니라 소득의 일정액을 일정기간(예컨대 3~5%를 10년에 걸쳐)에 상환하면 납입의무를 확 날려주는.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나. 중세 베네치아에서 화가들에게 물감값을 빌려주고 ‘융통성 있게’ 갚게 한 바로 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