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스핀융합연구센터 선임연구원(35)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KIST 내 여성과학자모임 총무를 맡고 있다는 말에 나이가 다소 지긋할 줄 알았는데 만나보니 훨씬 젊었다. 기자가 흠칫 놀라자 이 연구원은 “연구원에서 근무한 지가 벌써 10년째인 초등학생 엄마”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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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는 생각지 못한 문제들이 닥쳐왔다. 박사과정 첫 학기를 끝내고 4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오니 둘째 딸이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문 뒤에 숨어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첫째와도 서먹서먹해졌다. 이듬해에는 시어머님이 갑자기 심장 부정맥으로 쓰러져 큰 수술을 받았다. 남편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유학기간 동안 남편이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에 가거나 놀이동산에 다녀올 때면 ‘이혼했는데 아닌척 하는건 아닌가’하는 등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먼 타국에서 눈물을 훔치며 박사학위를 포기하겠다는 이 연구원을 다잡아준 사람 또한 남편이었다.
“매일 밤 잠도 못자고 끙끙댔죠. 그 때마다 남편이 조금만 더 있어보자고 위로해줬어요. 담당 교수님의 배려도 컸는데, MIT 연구실 화장실에서 혼자 울던 저를 우연히 보고 무슨 일인지 물었죠. 본인도 어린아이가 있는 엄마였던 터라 누구보다 잘 이해해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한국으로 올 수 있도록 배려해줬습니다. 주변의 배려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그 덕에 그는 동기들보다 빠른 편인 4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다시 연구원에 돌아와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연구원이 단순히 주변의 배려로 지금의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다고 한다면 오해다. 그는 자주 한국에 나오는 대신 남들보다 두 세배 열심히 연구에 몰입했다고 한다. 역류성 식도염과 십이지장궤양, 위염 등 각종 질병을 앓았던 것도 이때다. 병원에 다닐 시간도 없어 방학 때 한국에 오면 건강검진을 한 뒤 미국으로 출국했고, 남편이 결과를 보고 약을 받아 소포로 부쳐주곤 했다.
배려를 받으려면 그만큼 남보다 두 세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 연구원의 얘기다.
이 연구원의 연구 분야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하다. 바이오물질과 나노 전자재료 소재를 융합해 새로운 소자를 만들거나 기존의 물질을 개선해내는 것이다. 이 연구원은 지난 2009년 바이오와 나노기술을 융합한 공동 연구로 고출력 리튬 이차전지를 개발, 제 1저자로 권위지인 사이언스(Science)지에 논문을 실기도 했다. 일명 ‘바이러스 배터리’로 불리운 이 전지는 제조 과정에서의 에너지 소모가 적고 친환경적이면서도 성능은 더 뛰어났다. 현재 그는 스핀융합연구센터에서 기존의 혈당측정기보다 좀 더 손쉽게 당(글루코스)을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포스텍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했는데 개인적으로 물리학 공부가 재미있어 열심히 했다”며 “그러다 새로운 게 하고 싶어 박사 과정 때는 재료 중에서도 바이오를 다룰 수 있는 분야를 찾은 끝에 융합연구를 하게됐다”고 말했다.
연구원 내 여성과학자모임 총무를 맡으면서 이 연구원이 접해온 여성 과학자들의 어려움은 다른 분야의 여성들이 느끼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다같이 밤새 실험을 하다가도 아이를 데리러 중간에 잠시 나올 때 받은 눈총이나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이후 복직 문제까지. 기본적으로 남성 과학자들에겐 없는 문제들이 여성 과학자들에겐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학계가 다른 분야에 비해 성별에 관계없는 실력 위주의 평가가 가능하지만, 한국 사회에 태어난 남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 부분들이 아직까진 남아 있는 셈이다.
이 연구원은 “겉으론 쿨하고 아닌 척 하지만 남성들이 자신도 모르게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종종 드러나죠. 육아에 끙끙대는 여성에게 업무에 지장을 준다는 편견이나 오랫동안 공부에 열중하느라 결혼을 안한 여성에게 갖는 ‘결혼 안 한 여자’에 대한 편견들 같은. 특히 박사급 여성들의 경우는 대학교 때 캠퍼스 커플(CC)을 하지 않으면 결혼하기가 힘든데 그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사회활동에 대한 욕구가 있다면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조금만 참으라고 그는 조언한다. 이 연구원은 “여성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들을 정말로 잘 알고 있다”며 “특히 보수적인 분들이 많은 과학계에서 여성 비율이 워낙 적기 때문에 같은 행동을 해도 튀고 못하면 더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때 엄마를 몰라보고 서먹했던 딸들은 이제 누구보다도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다.
인터뷰를 끝낼 무렵 이 연구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방과후학교 수업을 신청하라는 첫째 딸의 담임 선생님 전화였다. 이 연구원은 “저는 공교육을 굉장히 신뢰하는 편이거든요. 근데 방과후학교는 필요없을 것 같아서 신청하지 않았는데 아이가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네요”라며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지식과 실력으로 무장한 프로페셔널한 과학자가 모성애 넘치는 엄마로 잠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현정 KIST 선임연구원은=1978년생. 부산 출신으로 포스텍 재료금속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신소재공학을 공부했다.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재료공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재학 중 ‘바이러스 배터리’ 기술을 공동 개발, 사이언스(Science)지 게재 논문 제 1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현재 KIST 스핀융합연구센터에서 유기·무기 나노하이브리드 물질, 스핀 복합소자, 바이오메디컬, 에너지 분야 등의 분야에서 융합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KIST 여성과학자모임 내 총무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