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생들이 서로 협의해서 책임을 부담하겠지만 투자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협의는 점점 어려워진다. 우리 법은 이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 자체를 권리·의무의 귀속주체인 법인으로 보고 있다. 회사 경영을 위임받은 이사 등 경영진에게 ‘선관주의의무’(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라는 법적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선관주의의무는 법인인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주의의무(duty of care)와 충실의무(duty of loyalty)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만약 의무를 위반하고 회사의 이익이 침해되면 이사는 그에 대한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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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와 업계에 따르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는 총 20건의 상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이 중 가장 논란이 되는 조항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하자는 내용이다. 지난 2022년 이용우·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상법 개정안을 발의한 게 시작점이 됐다. 지난 5월 22대 국회가 출범한 뒤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준호, 박주민, 강훈식, 김현정 의원이 차례로 제382조의3(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을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은 현행법상 이사가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규정한 내용을 ‘주주’로 확대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회사의 물적분할, 인수합병(M&A) 등 과정에서 지배주주만 이익을 보고 소액주주는 피해를 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에게까지 확대해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며 대부분 동의하는 분위기이지만, 개정안을 두고선 의견이 나뉘고 있다. ‘큰 의미도 없고 혼란만 가져오기 때문에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대파와 ‘실질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에 도입해도 문제가 없다’는 찬성파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韓 판례 “회사 이익이 전체 주주 이익”
상법 개정을 찬성하는 입장을 보면 선언적인 일반규정으로 도입할 경우 이사가 주주의 이익을 조금 더 신경 쓰게 되는, 일종의 외부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경영진이 준수해야 할 충실의무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충실의무를 도입하는 순간 기업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경영활동 위축으로 이어지며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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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주요국들 중 이사의 충실의무 범위를 주주로 확대해 규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의 경우 1970년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일본 상법에 일반규정으로 도입하는 걸 논의한 적이 있다. 2014년에는 ‘모회사 이사의 자회사에 대한 감독 책임’을 명문화하는 방안 등 선언적인 일반규정 도입을 논의한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두 번 모두 이사의 책임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로 입법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법문에 좋은 말을 넣어두면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질 것이란 기대와 달리 실제로는 법 적용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나라 또한 개정안을 시행한다고 해도 이미 판례에서 이사가 추구해야 할 회사의 이익을 ‘전체 주주의 이익’으로 보고 있어 판결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줄줄이 나오는 ‘소수주주 강화’ 개정안
최근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를 비롯해 기업의 지배 구조 규제를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이 줄줄이 발의되면서 경영 자율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집중투표제 실시 의무화 △감사위원 전원 분리선출 △독립이사제 도입 및 이사회 구성방식 강제 △권고적 주주제안제 도입 △전자주주총회 의무화 등 소수주주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재계에서는 “소수주주 권한을 강화시키는 효과보다는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경영권 공격 세력만 유리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기업의 밸류업을 위한 법 제도의 개선이 필요한 건 맞다. 하지만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 소액주주만을 위한 법 개정은 부작용만 가져올 뿐이다. 주주가 회사에서 소외되거나 소액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엔 ‘이사의 역할’로 따질 문제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친 개정안 마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