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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경제]①농협이 `재벌`이라고?

문정현 기자I 2012.05.29 07:10:00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5월 29일자 20면에 게재됐습니다.

[이데일리 문정현 기자] 지난달 농협이 별안간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서울 고등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4월 농협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 지정했는데, 사업 활동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호출자 제한 기업집단에는 삼성 현대자동차 SK LG처럼 총수가 이끄는 주요 대기업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보통 `재벌 집단`으로 불린다. 최근 신용·경제 사업 분리로 금융부문이 강화되긴 했지만, 농민을 위한 공공기관의 이미지가 강한 농협이 삼성과 같은 부류라니, 고개가 갸우뚱해질 만하다. 도대체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이 어떤 제도이기에 농협이 졸지에 "우리는 재벌이 아니다"는 주장을 하게 됐을까.

상호출자제한이란 대기업 계열사끼리 서로 주식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 계열사 A사가 100억원에 계열사 B사 지분을 사고 다시 B사가 100억원에 A사 지분을 사면, 실제 돈은 100억원에 불과하나 두 회사의 장부상 자산은 각각 200억원씩 총 400억원이 된다. 계열 B사가 신설 법인이라면 그룹으로서는 외부에서 힘들게 돈을 끌어오거나 계열사 A의 일방적인 자금 지원 없이도 회사를 세울 수 있다는 얘기다.

대기업이 손쉽게 덩치를 키울 수 있게 되면 시장 지배력이 향상되고 경쟁이 저하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 같은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 바로 상호출자제한 제도의 목적이다.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은 원래 자산이 2조원 이상인 기업이 대상이었지만 지난 2008년 5조원으로 기준이 바뀌었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요건에 해당하는 기업이 많이 증가했는데, 기준을 그대로 둬 기업의 부담을 키우는 것은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기준은 느슨해졌지만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규제다 보니 논란이 종종 불거진다. 앞선 농협이 대표적인 예다.

농협은 지난 2월 금융업을 담당하는 신용사업과 농축산물 유통·판매 업무를 담당하는 경제사업으로 분리하는 과정에서 경제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5조원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바람에 자산 규모가 3조6000억원에서 8조6000억원으로 늘어나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됐다. 정부 한쪽에서는 사업 확장을 위해 지원하고, 한쪽에서는 손발을 묶는 엇박자인 정책이 돼버린 셈이다.

농협은 이번 지정으로 계열사 간 빚보증할 수 없어져 농가 지원을 위한 계열사 설립 계획에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됐다고 주장한다.

또 앞으로 금융위원회의 자본시장법을 적용받게 되기 때문에 은행과 증권이 가지고 있는 사모펀드(PEF) 지분을 30% 이내로 낮춰야 한다. 농협은 유동화가 어려운 PEF인데다 즉시 처분해야 하기 때문에 헐값 매각이 불가피하다고 우려하고 있다. 게다가 신분이 대기업으로 올라가다 보니 그동안 누려오던 각종 세제 혜택도 받을 수 없게 됐다.

농협 관계자는 "배당수익을 농·축협이나 농민에게 돌려주기 때문에 국고로 환수되거나 외국인 투자자에게 이익을 주는 공기업, 일반기업과는 다르다"며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의 성격이 다른 만큼 같은 잣대를 대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공정위는 원칙대로 하자는 강경한 태도다. 공정위 관계자는 "농협도 엄연히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다른 기업과 다르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며 "과거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요건이 2조원이었을 때 농협이 포함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결국 상호출자제한 제도에 실효성이 있는 것인지 논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어려운 문제"라며 "80년대식 제도가 현재 시장에 적용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지만, 현재 정치적인 분위기를 봐서는 이 같은 기업 규제는 계속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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