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만난 정병국(65)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 위원장은 예술위가 관리하고 있는 문화예술진흥기금(문예기금)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연극·무용·음악·뮤지컬·문학·미술 등 순수예술에 대한 안정적인 지원을 위해선 1조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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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K컬처’, 그중에서도 K팝, 드라마 등 ‘K 콘텐츠’를 강조하는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산하 공공기관 수장으로 순수예술 지원의 필요성을 언급해 눈길을 끈다. 정 위원장의 생각은 명확했다. K컬처의 근간이 곧 순수예술이고,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이 없다면 K컬처 또한 꾸준히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1973년 1인당 국민 소득이 300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법(문예진흥법)을 제정하고 문예기금을 만들었다”며 “지금은 1인당 국민 소득이 3만 5000달러를 넘어섰지만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 규모는 더 적어졌다. 문화산업의 확장을 위해서라도 그 근간이 되는 순수예술 지원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술위는 예술창작 지원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문예기금을 관리하고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예술위의 주된 업무다. 1973년 설립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그 전신으로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이한다.
정 위원장은 지난 1월 예술위 위원으로 위촉됐다. 위원들의 호선을 통해 위원장에 선출됐다.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출신 인사가 예술위원장에 임명된 것은 정 위원장이 처음이다. 문화예술계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예술위가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깊이 관여한 기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 위원장 또한 이러한 우려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저 역시 (정치인 출신이라는 점을) 고심했기에 예술위 위원 지원에 대해서도 두 달 정도 고민했다”며 “그럼에도 내가 정치인이기 때문에 예술위 위원이 돼달라는 요구가 있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정 위원장의 이력을 보면 그가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준 예술인’임을 알 수 있다. 국회의원 시절 절반을 문화체육방송통신위원회 위원으로 지냈다. 제45대 문체부 장관으로 문화예술 정책을 이끌기도 했다. 정 위원장은 “예술위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바람 때문에 문화예술계 현장은 물론 실무자들도 많이 힘들어했다”면서 “이런 부분에 대한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내 할 일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생각을 전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정 위원장의 철학은 확고하다. 정 위원장은 “순수예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내야 하므로 상업성, 시장성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며 “순수예술은 자생력을 키우기보다는 안정적인 창작과 실험이 가능한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화예술 지원에 대해서도 이른바 ‘팔길이 원칙’으로 불리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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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위원장이 취임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예술계 현장과 만나는 것이었다. 지난 2월부터 약 한 달간 ‘대국민 현장 업무 보고’를 추진했다. 문화예술 분야별로 총 14번에 걸쳐 현장 예술인을 만나 예술위 정책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다. 정 위원장은 “대국민 현장 업무 보고를 통해 문예기금 확보, 투명하고 공정한 심사제도 구축, 효율적인 조직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정 위원장이 가장 고민하는 것은 문예기금 확충이다. 기금 충원 방안으로는 사회 기부 활성화를 생각 중이다. 정부 예산을 통한 지원은 ‘팔길이 원칙’이라고 해도 정부의 관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 위원장은 “미국처럼 사회적 후원을 통한 문화예술 지원 환경 구축이 중요하다”며 “예술위가 진행하고 있는 ‘예술나무’ 후원 캠페인을 더욱 활성화해 올가을 예술위의 대국민 비전 선포식을 갖고 ‘예술나무 한그루 심기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정 위원장이 정치인임에도 문화예술에 오랜 기간 관심을 가져온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향인 경기도 양평을 떠나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 시절엔 연우무대, 삼일로창고극장 등에서 송승환, 박정자, 손숙, 윤석화 등이 출연하는 연극을 직접 관람하며 문화예술을 즐겼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유학을 왔어요.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반 아이들이 주말에 영화관이나 음악회를 다녀온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당시 양평 시골집엔 전깃불도 안 들어오던 시절이었어요. 주눅이 들었죠.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을 처음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연극도 보고 음악회도 다니며 마니아가 됐습니다.”
정 위원장은 점점 각박해지는 한국 사회에서 문화예술의 감수성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정치판에 대해 “문화예술적인 감성을 통한 공감대를 만드는 능력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정 위원장은 “문화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같음’이 아닌 ‘다름’이며, 그런 다름을 인정할 때 상대를 존중하는 사회가 된다”며 “문화예술을 통한 정서적 함양의 기회를 얻지 않는다면 서로 자신의 주장만 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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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생 △성균관대 사회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과 석사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 △제16~20대 국회의원(2000년 5월~2020년 5월) △국회 문화체육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2010년 6~12월) △제45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2011년 1~9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