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 나이로 ‘국내 최고령 만학도’가 된 박영학씨는 “이런 날이 오길 기대했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고 말했다. 아흔에 접어든 2019년 2월 한국방송통신대 일본학과에 입학한 박씨는 한 학기도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달려 드디어 졸업장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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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10년간 노인대학을 다니던 박씨가 대학 입학을 결심한 건 ‘배움에 대한 한’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1948년 교원시험을 치고 교원양성소에 입학한 그는 6개월이란 짧은 교육을 받은 후 곧바로 임용됐다. 교사양성소는 전란 여파로 모자란 교원을 단기간에 배출하려고 세운 교육기관이다.
정규과정을 밟은 사범학교 출신 교사와 출발선이 달랐던 그는 배움의 공백을 채우려 꾸준히 노력했다. 승진에 필요한 기본점수도 사범학교 출신과 다르고, 양성소 출신 교사가 교장까지 오르는 경우도 드물어 동료보다 몇 배 더 노력을 기울였다. 박씨는 “승진하려면 연구논문을 내서 통과해야 하고 교육도 받아야 하는데 열심히 노력해서 교장까지 됐지만 그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었다”고 돌이켰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탓에 대학 입학도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교사양성소 자격증은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인정되지 않아 다시 고등교육부터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자식들도 모르게 진주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를 다니며 3년간 대면수업을 받아 입학조건을 모두 갖췄다. 박씨의 장손 박용관(32)씨는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수업을 받으러 다니신지도 몰랐다”며 “나중에 대학 입학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이었지만 처음엔 어색했다. 박씨는 “처음엔 젊은 사람들하고 생활하고 그러니까 쑥스럽기도 하고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었는데 나중엔 옆에서 하나씩 알려주고 친해지니까 공부에도 재미가 붙었다”고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온라인 수업이 확대된 것은 또 다른 난관이었다. 박씨는 인터넷 사용이 서툰 탓에 “수업을 들으려고 하는데 컴퓨터가 켜지지 않아 아들을 불렀더니 그냥 선이 빠져 있었던 거라고 하더라”며 “학교 나가서 듣는 수업보다 온라인 수업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박씨는 ‘생즉고, 고즉행’을 강조했다. 산다는 건 고생하는 것이고, 고생길이 곧 행복과 직결된다는 의미다. 그는 “계속 공부하면서 목표를 갖고 살다보니 건강에도 좋고 평생 하고 싶은 것도 이뤘다”며 “나이에 얽매지 말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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