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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土의 기운일까, 祖의 덕일까…진주 부자마을의 비밀

강경록 기자I 2021.12.17 05:00:02

富의 기운이 가득한 경남 진주 승산마을
허씨와 구씨가 6백년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와
풍수지리적으로 역수, 부자의 기가 있어
LG와 GS의 기틀을 마련한 만석꾼 ‘허준’
韓 100대 재벌 중 30명 배출한 지수초등학교

경남 진주 승산마을을 하늘에서 본 모습.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늑하다.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도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진주(경남)=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예부터 경남 진주는 물자가 풍부한 도시였다. 물자가 풍부한 도시는 문화와 교육이 발달하는 법. 조선시대에 이르러 진주에서 양반문화와 교방문화가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경북 안동은 단 2명의 정승만 배출한 반면, 정승을 11명이나 배출했을 정도로 세가 대단한 도시였다. 진주는 풍수지리와 지기가 좋은 지역으로도 꼽힌다. 옛 시대의 영화를 일일이 논할 것도 없다. 근대 들어 진주는 한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굴지의 재벌들을 배출한 도시다. 재미있는 점은 이 재벌들이 한 시골마을에서 자라 한 학교에서 동문수학했다는 사실이다. 진주 동쪽에 자리한 지수면의 한 마을과 초등학교다.

진주 승산마을의 연정. 김해 허씨 연당 허동립(1601~1662)을 추모하는 제실이다. 허동립은 1636년 병자호란 때 병마사로 제수되어 큰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허씨와 구씨가 600년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았던 마을

거부의 기운으로 가득 찬 마을과 학교를 찾아간다. 목적지는 경남 진주 지수면에 자리하고 있는 승산마을이다. 이 마을은 어떻게 조성된 것일까. 본래 600여년 전부터 허씨 집성촌이었다. 300년 전 허씨 일가에서 능성 구씨를 사위로 맞으면서 허씨와 구씨 일가가 대대로 사돈을 맺으며 함께 살았다.

마을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수십 채의 기와집이 모여 있어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여기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늑하다.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도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경남 진주 승산마을을 하늘에서 본 모습. 이 마을에서 가장 작은 가옥이 500평 정도로, 보통 1200~1300평에 달한디거 힌다.


실제로 이 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역수(逆水). 물이 나가는 곳이 보이지 않아 재물이 모인다거나, 양 날개를 펼친 학 모양의 방어산이 이 마을을 가리키고 있어 부자의 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승산마을에는 구한말 만석꾼만 2명이 있었다. 한 마을에 만석꾼이 한 명만 있어도 부자마을로 통하던 시기였다. 여기에 오천석꾼과 천석꾼도 여러 명이 살았을 정도로 부유한 마을이었다. 부자의 기운은 후세에도 이어졌다. 마을 집들을 둘러보다 보면 깜짝 놀란다. 집마다 내걸린 안내판에는 대기업 LG와 GS 계열의 창업주 생가라고 적혀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그룹 총수들이 서로 이웃하며 산 마을이다. 모두가 허씨 또는 구씨다. LG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을 비롯해 LIG 구자원 회장, 쿠쿠전자 구자신 회장, GS 창업주인 허준구 회장과 그의 아들인 허창수 현 회장, 알토전기 허승효 회장, 삼양통상 허정구 전 회장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차다. 대한민국 산업화를 일군 기업가 다수를 배출한 마을이다.

경남 진주의 승산마을. LG, GS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일으킨 창립자들의 생가가 모여 있는 마을이다.


◇구한말 만석꾼 ‘허준’, LG·GS의 시발이 되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구한말 만석꾼 중 한 명인 허준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허준은 GS그룹의 뿌리인 허만정의 부친으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일화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는 평소 남이 볼 때는 짚신을 신고 다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들고 다닐 정도로 근검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홍수로 인근 주민들이 호별세를 내지 못하게 되자 세금을 대신 내주기도 했을 정도로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77세 때는 자신의 재산이 화로 남을 것을 염려해 재산을 4등분해 국가와 이웃, 친족과 조상에게 나눴다. 그의 의장비에는 이런 내용을 새겨 자식들이 지키도록 했다. 분배한 재산 중 논 600마지기는 진주여고의 전신인 진주일신학당을 세우는 데 쓰이기도 했다.

경남 진주 승산마을은 담장 너머 국내 굴지의 대기업 창업주의 생가가 모여있다.


그의 아들인 허만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최준, 안희제와 함께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한 백산상회를 세웠던 인물이다. 이후 허만정은 1946년 이웃이자 사돈인 연안 구인회(LG그룹 창업주) 씨가 락희화학공업사를 창업할 때 거액의 자본을 투자했다. 이 투자는 훗날 LG그룹의 주춧돌이 됐다. 그러면서 허만정은 그의 아들(3남)의 경영수업을 부탁했다. 당시 허만정은 아들인 허준구(전 LG건설 명예회장)에게 “구씨가 알아서 잘할 테니 절대 경영에는 간섭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마을을 천천히 둘러볼 차례다. 마을 들머리에는 효주공원이 있다. 이곳 한쪽 바닥에 설치된 네모난 돌판도 ‘좋은’ 기운이 서린 곳으로 통한다. “확실하지 않지만, 돌판에 그려진 문양이 허만정 집안의 병풍에 그려진 문양이라는 얘기가 있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드넓은 터에 50여 채의 한옥이 펼쳐져 있다. 가옥은 여느 양반마을의 그것보다 크다. 가이드는 “이 마을에서 가장 작은 가옥이 500평 정도로, 보통 1200~1300평”이라고 소개했다. 이런 기와집들이 일제강점기에는 150여 채나 있었지만, 지금은 단 50여 채가 남아 있다.

경남 진주의 승산마을은 LG, GS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일으킨 창립자들의 생가 50여곳이 모여있다. 마을에 있는 창립자 생가의 문고리를 잡으면 부자의 기운을 얻어갈 수 있다고 한다.


◇한국 100대 재벌 중 30명이 다닌 학교가 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재벌과 재벌의 집이다. LG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생가와 그 옆에는 구자원 LIG 창업주 생가, 바로 옆이 쿠쿠전자 구자신 회장의 생가가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허창수 GS 회장의 본가다. 담길을 더 걷다보면 허만정 GS 창업주의 아버지인 허준 선생의 생가도 보인다. 그 앞으로 LG 구자경 회장의 외가와 GS 집안 종가,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창업주의 누나 생가가 있다. 골목 끝에는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의 생가도 있다. 마을 전체가 궁궐을 걷듯 아늑하고 고풍스럽다. 고가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래도 생가 주인의 이름이 적힌 알림판 앞에서 부자의 기운을 받아볼 수는 있다. 그래도 아쉽다면 대에 걸린 문고리를 잡고 부자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도로 건너편에는 초등학교가 있다. 1921년 개교한 지수초등학교다. 지난 2009년 인근 압사리 송정초등학교와 병합되면서 이름을 내주고 폐교됐다. 대신 텅 빈 학교 건물에는 ‘옛 지수초등학교’라는 명패를 새로 내걸었다.

구인회(LG), 이병철(삼성), 조홍제(효성) 회장이 심었다고 알려진 지수초등학교의 부자소나무


이 학교의 명성은 졸업자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다. 1980년대까지 지수초등학교 출신 중 30명이 한국의 100대 재벌에 이름을 올렸다. 아동문학가인 최계락 시인의 모교도 지수초다. 무엇보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가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니면서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를 즐기기도 했다.

교정에는 ‘부자소나무’가 있다. 구인회·이병철·조홍제 회장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9년 태풍으로 부자소나무가 일부 부러지자 LG그룹에서 소나무 전문가를 파견해 치료하고 고정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다. 졸업생이나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어 부자의 기를 받아간다.

1980년옛 지수초등학교 교문이 있던 자리. 1980년대까지 지수초등학교 출신 중 30명이 한국의 100대 재벌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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