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株소설]D램 '고점' 논란, 삼성전자가 속으론 웃는 이유

고준혁 기자I 2021.08.19 05:00:00

'비메모리' 비중 확대에 '메모리' 캐시플로우 필수
"디램, 너무 높은 가격, 너무 낮은 가격 둘 다 싫다…안정성 원해"
작년 3분기부터 점유율 확대, 빨리 가격 하락 전환시키려는 '의도'
격차 좁힌 마이크론에 '삼성의 힘' 보여줬단 해석도

[이데일리 고준혁 기자] “경우에 따라 어떤 기업은 산업 사이클 자체를 ‘창조’할 수 있다. 디램 업계 1위인 삼성전자(005930)와 이번 디램 가격 사이클에 대한 얘기다. 업계 1위의 위엄이란 이런 것이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사진=삼성전자)
반도체주 하락이 코스피에 미치는 효과는 생각보다 엄청났습니다. 외국인이 코스피 시총 1, 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000660) 등 반도체주를 대거 팔자, 원화의 급격한 약세가 나타났습니다. 한국주식을 팔고 받은 많은 양의 원화를 달러 등 자국 통화로 바꿔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원화 약세는 다시 외국인 매도로 이어졌습니다. 매도가 거세지면서 원화 가치는 또 한 단계 내려갔습니다. 이 악순환에 지난 8월 둘째 주(9~13일) 외국인은 코스피에서 7조262억원을 순매도해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습니다. 같은 기간 원·달러 환율은 1144.3원에서 1169원으로 급등했습니다.

악순환의 첫 단추는 급격히 진행될 것으로 확인되는 중인 4분기 디램 가격 하락 전환입니다. 그런데 일각에선 가장 큰 피해자로 보이는 삼성전자가 이 피크 아웃을 내심 즐기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본인들이 의도한 바가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비메모리’로 가려는 삼성전자

경기민감 업종이란 말 그대로 경기 자체가 좋아지고 나빠지는 시기에 따라 고대로 실적이 들쑥날쑥한 업종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조선, 철강, 정유, 석유, 화학 등이 속합니다. 이들 업종은 경기 사이클에 따라 실적이 들쑥날쑥합니다. 반도체는 경기민감 업종에 속하진 않지만, 비슷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경기 사이클을 판단하는 대표적인 원자재인 유가와 반도체주의 상관관계는 매우 높게 나타납니다. 경기가 좋을 때 사람들이 IT 제품을 많이 쓰고, 이에 반도체도 많이 소비된다는 식입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중 하나인 디램의 경우 경기민감 업종의 성격이 더 짙습니다.
(출처=뉴욕증권거래소, 뉴욕상업거래소)
디램은 과점 산업으로 분류됩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이렇게 세 개 업체 순으로, 전체 시장을 거의 다 점유하고 있습니다. 제품의 질 차이도 별로 없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웨이퍼(Wafer)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통해 대규모 공장에서 다량 생산됩니다. 평화로운 이곳은 수요와 공급 곡선에 따라 만들어진 가격 사이클에 따라 실적도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반면 중앙처리장치인 CPU와 AP 등을 말하는 비메모리 반도체는 좀 다릅니다. 설계 아이디어 자체가 중요한 비메모리는 제품 자체가 획일화되지 않아, 그때그때 주문을 받아 특수제작됩니다. 소품종 대량 생산되는 메모리가 다품종 소량 생산되는 비메모리보다 경기 민감도가 높은 배경입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작년 기준 디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41.7%, 비메모리에선 2.2%를 기록했습니다.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반도체 설계도를 받아 생산하는 파운드리(위탁생산)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 중입니다. 메모리에서 번 돈으로 변동성이 작은 비메모리 파운드리 사업에 투자해 기업 체질을 바꾸는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먼 여정을 떠나는 삼성전자에 메모리 사업의 현 상태 유지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그런데 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점점 어려워지고 이를 구현할 장비는 비싸기만 합니다. 가뜩이나 대규모 공장을 지어 고정비가 많이 드는 판국에 케펙스(Capex)가 갈수록 늘어가는 구조라면 수익성은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묘책이 필요합니다.

◇ 일부러 점유율 늘리며 ‘사이클’ 축소하는 전략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디램에서 번 돈을 비메모리로 쏟아부어 키우겠다는 성장주 전략을 펼치고 있다”며 “이러한 사업 방향에서 뜻밖에 중요한 건, 경기민감도가 높은 메모리 사업의 변동성을 줄이면서 꾸준한 캐시플로우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디램의 슈퍼사이클 자체를 용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 이러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며 “너무 높은 가격도 싫고 너무 낮은 가격도 싫기 때문에 사이클의 주기와 진폭 자체를 줄여 축소시키려 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디램 가격 사이클이 축소된다면 삼성전자로선 좋을 때 많이 벌고 안 좋을 때 적게 버는 널뛰는 실적을 안정화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일개 기업인 삼성전자가 어떻게 산업의 사이클을 조정할 수 있겠느냔 것입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 시점까지는 삼성전자의 계획대로 돼 가고 있다고 합니다. 디램은 과점 산업이고, 삼성전자가 점유율 1위 업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출처=트렌드포스)
지난해 3분기에서 올해 1분기까지 메모리 반도체 3사의 시장 점유율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3위인 마이크론은 25%에서 23.1%로 1.9%p 낮아졌습니다. 반면 2위인 SK하이닉스는 28.2%에서 29%로 0.8%포인트 상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위인 삼성전자는 41.3%에서 42%로 0.7%포인트 상승했습니다. 상위 2곳의 경우 SK하이닉스는 작년 4분기 29.5%에서 올 1분기 0.5%포인트 내렸지만, 삼성전자는 같은 기간 42.1%에서 0.1%포인트 내렸습니다. 디램 현물가와 고정가는 모두 작년 11월쯤부터 올랐습니다. 3개 기업 중 삼성전자가 디램 가격 상승 사이클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늘리고 있는 것입니다.

과점 산업에서 시장 점유율 상승은 곧 공급 증가와 연결됩니다. 자칫 가격의 하락을 부를 수 있음에도, 공급을 늘려 점유율을 확대하는 전략은 2, 3위 업체면 몰라도 큰 격차를 낸 1위 삼성전자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지난 사이클에서 삼성전자는 되레 공급을 줄여 점유율을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에 내어주면서까지 디램 가격 상승을 좀 더 위로 또 길게 이끌었습니다. 압도적인 점유율 차이가 아니면 쉽사리 쓸 수 없는 전략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무리해서 점유율을 끌어올릴 이유가 없는데도 정반대로 공급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고의성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출처=하이투자증권)
디램 고객사들은 디램 가격 업사이클 땐 ‘오늘보다 내일이 더 오른다’는 점을 감안, 필요 이상의 주문을 냅니다. 반대로 다운사이클 땐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내린다’는 이유로 필요 이하의 주문을 냅니다. 즉 디램 가격 상승과 하락 때 모두 실제 상황과 무관한 수요가 껴 있단 얘깁니다. 가격 상승이나 하락의 기울기가 가파를수록 이 가짜 수요는 더 많아질 것이고, 가격 반전 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높게 오를수록 추락도 깊은 이치입니다. 삼성전자의 고의성이란 공급을 늘려 가격 상승 기울기를 완만하게 해 이 가짜 수요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것입니다. 거품이 빠지면서 가격 상승에서 하락, 하락에서 상승의 전환이 앞당겨집니다. 또한 그만큼 낙폭도 얕을 것입니다. 가격의 위도, 아래도 깎아서 변동성을 최소화하는 전략은 이렇게 이뤄집니다.

삼성전자의 점유율 확대를 마이크론에 본떼를 보여주기 위해서란 재밌는 해석도 있습니다. ‘세계 최초 176단 낸드플래시 공급’, ‘최초의 4세대 10㎚ 디램 양산’ 등 마이크론의 약진을 연이어 전하는 소식을 들으며 벼르고 있었단 얘깁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디램 퓨어 업체인 SK하이닉스가 디램 상승기 동안 R&D 자금 마련을 하고 있고, 마이크론이 삼성보다 기술이 앞섰다느니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동안 삼성전자는 자존심이 상했을 수 있다”며 “삼성의 힘이 뭔지 보여주자는 의견이 다분히 나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밖에 공급량 증대를 공장 증설이 아닌 현재의 시설에서 최대한 쥐어 짜내는(Supply Squeeze) 방식을 택하는 점도 변동성 축소의 한 방법입니다. 물론 이번 디램 가격 하락은 ‘코로나19에서 사람들은 노트북을 더 산다. 안 산다’는 수요에 관한 논쟁도 분명히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영향인지 확인하긴 어렵지만, 디램 사이클을 축소하려는 삼성전자는 이를 ‘호재’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