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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運命).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결정을 뜻한다. 예로부터 많은 고대인들은 이 같은 운명론을 믿고, 눈앞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자신을 맡겼다. ‘결국 인생은 모로가도 운명에 따라가게 돼 있다’는 운명론은 자체가 매력적인 소재인 만큼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콘텐츠로 다뤄져왔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다만, 과거엔 운명에 순응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뤘지만, 현재는 주인공들이 운명을 거스르고 스스로 개척하는 내용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점차 주체적으로 바뀌어 가는 시대상을 반영했을 것이다.
레진 ‘무명의 등불’은 운명을 소재로 한 시대극이다. 부패한 조선 왕조에서 여자아이 2명이 임금과 역적의 운명을 같이 타고 태어난다. 두 아이는 운명으로부터 자식을 지키기 위한 부모의 노력 아래 성장한다. 온양 군수 김병선은 사람들 앞에 딸 초희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했고, 양반 자리를 포기하고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된 소현은 딸에게 영혼이 없다는 의미의 ‘무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세상의 욕심의 버리게 했다. 하지만 운명은 이 2명의 여자아이를 만나게 한다. 소현의 죽음 이후 종으로 한 부자 상인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 무영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주인 아들의 머리를 돌로 내리친다. 그 때 길을 가던 김병선이 이를 목격하고 무영의 목숨을 구해주게 된다.
김병선은 무영이 과거 소현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임을 알아본다. 이에 무영을 딸처럼 생각하며 안쓰럽게 여긴다. 집안에서만 외롭게 자란 초희도 출신과 상관없이 무영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두 소녀는 김병선의 보살핌 아래 함께 자라게 된다. 초희는 세자빈이 돼 부패한 나라를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다. 무영도 친구 초희의 꿈을 옆에서 이뤄주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두 아이가 15세가 되던 어느 날, 초희는 무영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는 김병선의 뒤를 쫓아 저잣거리를 누비게 된다. 세상 밖으로 처음 나가게 된 두 아이는 과연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역적이 될까, 아니면 세상이 바꾸는 등불이 될까.
‘무명의 등불’은 예전부터 많이 사용돼 왔던 서사 구조를 띄고 있지만, 스토리 전개 과정이 상당히 세밀하고 부드럽다. 점점 마음 속 깊이 있는 욕망에 손을 내미는 무영의 모습도 설득적으로 풀어냈다. 각각의 캐릭터들의 특징도 잘 살려 눈에 잘 와닿는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두 소녀의 스토리, 그리고 부패에 찌든 당시 조선의 상황, 판타지적 요소까지 고루 결합돼 독자들의 흥미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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