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년 남성이 회사로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따졌다. 나이스신용평가가 두산과 두산중공업에 대한 장기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는 기사를 왜 썼냐는 것이다. 일주일 전 나온 기사와 내용이 똑같은데 무슨 의도를 갖고 썼는지를 물었다.
그 ‘똑같다’는 기사는 한국신용평가가 두산과 두산중공업에 대한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한 내용이었다. 각기 다른 신평사가 일주일 차이로 등급을 낮춘 거라서 따로 썼고, 같은 회사에 관한 것이니 등급 하향조정한 이유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신평사가 대체 뭐하는 곳인데 이런 악의적인 자료를 내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온 가족과 친인척까지 두산중공업에 투자했는데 주가가 떨어져서 손해가 막심하다는 하소연이 이어진다. 그래서 물었다. 두산중공업을 왜 샀냐고. 답은 간단하다. “누가 주가가 오를 거라고 사라 하기에”
주식투자해서 돈 벌고 싶으면 먼저 공부부터 하시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으나 꾹 참고, 신평사가 뭘 하는 곳인지, 기사로 쓴 등급평가 보고서는 어디서 볼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2000년 증권부에서 기자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비슷한 전화와 메일을 많이 받았다. 기사 내용이 아무리 부정적이어도 주가가 오르면 상관없다. 문제는 주가가 하락할 때다. 그때부터는 그 주식을 갖고 있다는 투자자들의 엄청난 항의에 시달려야했다. 당시 주식 커뮤니티에 기자의 사진이 돌기도 했고 휴대폰 번호가 공개되기라도 하면 번호를 바꿔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전화폭탄을 맞기도 했다.
“밤길 조심하라“는 식의 협박형, ”아들 결혼시킬 돈인데 반 토막 나서 죽고 싶다“는 식의 하소연형, ”경쟁사로부터 돈 받고 쓴 거냐“는 식의 억지형, ”대출받아 투자했는데 손실이 막심하니 다른 좋은 종목을 알려달라“는 식의 네고형 등 유형도 다양했다. 투자했다 손실 입으면 무조건 금융감독원 앞으로 달려가 시위를 하고, 마녀사냥 하듯 누군가에게 사태의 책임을 물어 화풀이하는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근 20년이 지난 현재 투자자들의 의식도 상당히 성숙해졌다. 다시 증권시장부로 와서 보니 예전만큼 기사에 대한 막무가내식 항의전화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비롯해 동양증권 회사채 사태, 키코사태, 저축은행 영업정지 등 크고 작은 위기를 겪으면서 투자자들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스스로 공부하고 꼼꼼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불완전판매 근절이나 금융소비자에 대한 교육 강화 등 당국과 업계의 노력이 더해지기도 했다.
금융시장의 변수는 더 다양해지고 금융상품 구조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돈을 벌기는커녕 있는 자산을 지키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투자문화가 성숙하긴 했지만, 누가 좋다고 추천하면 일확천금을 꿈꾸면서 묻지마 투자에 나서는 이들도 여전하다. 최근 걸려온 전화 한통은 그래서 참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