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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한 사람은 향을 켜두고 그 앞에 조심스럽게 다가선다. 오려낸 한지 조각 하나하나에 구멍을 내고 곁가지를 태운다. 숨 한번 잘못 쉬고, 눈 한번 딴 데로 돌리면 홀라당 태워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수백, 수천 장이다. 그저 한두 장 그을리고 말았다면 ‘태웠다’고 내세울 일도 아니다.
또 다른 사람은 프레스코화를 종이에 그린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 같은 벽화에서나 봤던 그거다. 장지 위에 석회를 얇게 바르고 그 뒤에 색을 올려 은은하게 배어나오도록 하는 배채법이 그이의 작업방식. 덕분에 자신의 주제를 잊은 종이는 거친 질감을 얻었다. 마치 돌 위의 그림인 양 우툴두툴 제멋대로다.
전통을 깬 독특한 방식으로 영역을 확장한 두 명의 한국화가가 각각 개인전을 열고 특별한 작품을 내보이고 있다. 작가 김민정(55)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현대화랑에서 ‘종이, 먹, 그을음’이란 타이틀로 먹과 불이 결합한 거대한 한지의 장을 펼쳤다. 작가 이재훈(39)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초원의 결투를 위해’란 저돌적인 제목을 내걸고 손끝의 감각을 부르는 두툼한 질감의 ‘조각회화’를 선뵈고 있다.
▲“재료가 완벽한데 더 얹어봤자…”
숙원을 이뤘다. 대학시절부터 현대화랑은 꿈의 무대였다. 드디어 그곳에 작품을 걸었다. 세월의 깊이가 말해주듯 여기까지 오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작가 김민정은 한지 콜라주 작업을 한다. 거대한 한지 위에 수없이 작은 한지를 겹쳐 붙여 작품을 완성한다. 먹 머금은 대붓으로 내리쳐 얻은 붓자국을 다른 한지에 그려서 오려낸 것(‘페이징’ 2017), 오방색 보자기인 양 색색의 한지를 조각낸 것(‘스토리’ 2011), 비 오는 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알록달록한 우산을 모양대로 잘라낸 것(‘스트리트’ 2010).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그을리고 태운다’는 행위. 찢고 조각낸 한지도, 큰 획의 필선을 따라 잘라낸 한지도 마무리는 ‘그을리고 태우는 것’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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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행위에 집중해 수없이 반복하면 잡념이 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수행이고 성찰”이라고 말한다. ‘통찰’(Insight)이란 제목이 유독 많은 건 그 때문일 터. 자신이 마치 공장서 반복작업을 하는 ‘공순이’가 된 느낌이 좋단다. 태울 때도 잡념이 없고 붙일 때도 잡념이 없다.
관건은 역시 한지다. “한지 자체가 완벽한데 뭐가 더 필요할까” 싶었단다. “이미 다 돼 있는데 쓸데없이 뭘 한다고 난리를 친 거구나” 했단다. 그러니 작업은 종이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었다. 양지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이란다. “종이도 와인과 같다”는 철학도 펼쳤다. 와인이 그런 것처럼 종이가 살기 좋은 데에선 사람도 살기가 좋다는 뜻이다. 어쩌다 한 번씩 한국 나들이를 할 때마다 족히 100㎏쯤 되는 한지를 공수해간다. 서양화의 본 고장에서 한국화의 전통을 한지로 지켜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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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말을 참 전라도식으로 한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고향 전남 광주의 명랑한 억양은 빼버리질 못했다. 활달한 성격과 스스럼없는 태도로 첫눈에 호감을 준다. 그런 김 작가의 지난한 작업을 이해하려면 그이의 살아온 세월을 곁들여 봐야 한다.
인쇄소를 운영하던 아버지와 이불집을 하던 어머니의 야무진 손끝을 물려받았다. ‘마지막 빨치산’이었다는 어머니의 교육열 덕에 서울 유명 미대에 진학했지만 열아홉 살 너무 일찍 한 결혼이 끝내 발목을 잡았다. 결국 파경. 작품도 가족도 지키지 못한 고단한 삶의 마지막에서 선택한 것이 유럽행이었다. 이탈리아에 정착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비행기 탈 때 품고 갔던 한지를 꺼냈다.
밀라노 시내 중심가 화랑에서 첫 작품을 판 이후 26년, 결국 영국박물관이 그이의 작품을 3점이나 소장할 만큼 유럽행은 성공적이었다. 그럼에도 그이는 여전히 반성 중이다. 30여년을 초와 향 앞에 앉았지만 아직도 “원래의 고요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일”이 필요한 모양이다. 전시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그이의 분신 30여점으로 꾸렸다. 10월 8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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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건·사고를 벽화로 기록하듯
어느 날 문득 100여년 전이 보였다. 신문을 여니 온갖 기사와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모던걸이 보이고 화신백화점이 자주 등장했다. 신기한 건 그 모두가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더란 거다. ‘폭주족’에게 혀를 끌끌 차는 내용이며 전차에 사람을 더 태우려 동원한 ‘푸시맨’ 얘기가 튀어나왔다. 가장 심각한 것은 ‘주택문제’였단다. 100여년이 지나도 해결이 안 되고 있는 집 문제라니.
작가 이재훈이 이번 전시에서 비중을 둔 것은 소재다. 이를 위해 근대로 떠났다.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 지금과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찾는 게 좋겠다 싶어 찾아간 시간이 근대였다는 거다. 어찌 보면 근원을 찾는 일이었다. 왜 굳이? 지금이란 시간을 살고 있지만 과거는 결코 현재와 무관치 않을 테니. “예술이 아무리 대단해도 사는 것 이상일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다만 근대의 사람을 대면할 순 없지 않나.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는 건 사물이다. 그래서 작품도 정물로 표현한 거고.” 전시작인 회화 12점과 설치 1점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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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기법의 고민은 안 하는 듯하다. 이 작가는 미대 3학년인 2000년부터 ‘벽화기법’이란 프레스코화를 시도했다. 실험과 시행착오 끝에 완성은 2007년 봤다. 회칠은 같지만 흔히 서양벽화에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서양식은 젖은 상태에서 색을 올리는 ‘습식’이지만 이 작가는 말려놓은 뒤 색을 붙이는 동양식 ‘건식’으로 작업한다. 거기에 그만의 방식으로 하나 더 추가. 석회를 바르는 지지판을 장지로 바꿔버린 거다.
“물질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다”는 이 작가는 ‘만지는 그림’을 지향한다. 손으로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서 가져온 이미지를 뒤엉켜놓은 ‘동물의 왕국’(2017), ‘가드닝’(2017), 옛 신문광고 이미지를 모은 ‘붉은 사랑’(2017) 등 2m에 육박하는 대작이 그렇다. 하지만 4m60㎝의 거대한 기둥을 이룬 설치작품은 단연 압권이다. 전시명과 같은 제목을 단 ‘초원의 결투를 위해’(2017)다. 아무 지표 없이 뒤죽박죽 모호하게 들인 느낌이랄까. 축음기·전차노선도·백화점 등 신문물은 물론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활보하는 인물상까지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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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눈에서 멀어지면 기억은 흐려진다.” 그래서 이 작가의 작업은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어차피 역사라는 건 평화스러워 보이는 초원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니까. 기록해야 한번 더 들여다볼 시대상이니까. 근대성 극복? 이 작가가 볼 땐 사실 그 말도 우습다. 열어봤더니 현대와 다를 것 없는 근대를 극복하자는 거 아닌가. 전시는 24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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