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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서울 이마트 구로점 생활용품 코너 앞. 합성세제를 고르던 주부 박모(50)씨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옥시 제품 말고 다른 것들은 믿고 써도 되는 건지 의심스러워 선뜻 손이 안 간다”며 이렇게 말했다.
◇ 가습기 살균제 원료물질 성분표시 없어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 소비자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생활화학 가정용품을 아예 쓰지 않을 수 없지만, 제품 성분표시란을 꼼꼼히 들여다봐도 유해 성분 포함 여부를 일반 소비자들로선 확인하기 어려운 탓이다. 더군다나 성분 표시를 제대로 하지 않은 업체들도 많아 성분 표시 방식을 조속히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서울 시내 주요 대형마트 진열대에 전시된 제품들을 확인한 결과, 항균제·살균제·탈취제 등에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 원료 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이 포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제품에도 해당 독성물질이 포함돼 있다는 성분표시가 기재돼 있지 않았다. 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과 같이 현재 환경부가 유해성 여부를 검증 중인 다른 독성화학물질도 마찬가지였다.
LG생활건강·P&G·이마트 등이 판매하는 일부 제품의 경우 ‘더 자세한 성분 정보를 원하시면 웹사이트를 방문하세요’라는 안내문구가 찍혀 있었다. 하지만 해당 업체의 웹사이트를 직접 찾아 확인해 본 결과, 상세 제품 정보는 없이 제품 홍보를 위한 내용만 올려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생활화학 가정용품 사용이 불가피한 시민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성동구 이마트 왕십리점에서 만난 임모(52·여)씨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 불안한 마음에 성분표시를 자세히 들여다보긴 하지만 우리 같은 주부들이 유해성분이 들었는지, 유해성분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성모(34·여)씨도 “인터넷으로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 독성 화학물질도 찾아보긴 했지만 그런 것들이 제품에 포함돼 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 독성물질 함유사실 숨기고 생활용품 판매도
시민 불안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성분 표시를 강제할 방법은 없다. 약사법상 항균·살균 제품은 주요 성분만 명시하도록 돼 있어 함유량 비중이 낮아 첨가제로 분류하는 독성화학물질들은 의무 기재대상이 아니다.
주무부처인 환경부는 모든 제품을 대상으로 단속을 실시해 유해물질 함유 여부를 적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정기적으로 조사를 실시하지만 주요 성분 표기법 준수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소량의 독성 물질까지 잡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며 “직접 사용해 본 소비자들의 신고나 외국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독성 물질 조사가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소량이라도 화학물질 특성상 오랜 기간 축적되면 문제가 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기영 가천대길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체내에 한 번 들어온 화학물질은 몸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에 주성분 못지 않게 첨가제 점검이 중요한 문제”라며 “1~2% 미만이 함유되었다 해도 수년 동안 사용한다면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탈취제나 합성세제 등 생활화학 가정용품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현재 생활화학 가정용품의 경우 주요 성분과 중량·용량 등을 표시하도록 하고 있지만 모든 성분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규정하진 않는다. 지난 2013년 11월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세정제나 합성세제와 같은 생활화학 가정용품만이라도 모든 성분을 표시하게 하는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3년째 산업통상자원위원회 법률안소위원회에 발이 묶여 있다. 오는 29일까지 통과되지 못하면 19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된다.
염형철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제품 성분이나 독성물질 성분 표시는 국민들의 안전에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할 문제”라며 “제조사 중심의 관리에서 안전관리 중심으로 법률을 개정하고 현재 의무화 돼 있는 몇몇 물질 이외에 각종 독성물질 표기도 의무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약사법으로 관리되는 의약외품 외용소독제는 현재 주요 성분 5개(과산화수소수·이소프로필알코올·염화벤잘코늄·크레졸·에탄올)만 의무적으로 명시토록 규정돼 있다”면서 “올 6월부터는 보존제나 타르색소도 반드시 기재토록 개정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