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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에 담긴 페르소나'..거장, 거장의 내면을 보다

김은비 기자I 2021.10.05 05:30:01

루이비통 서울 '앤디를 찾아서' 展
사망 1년 전까지 소장품 24점 선봬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20세기 팝아트의 대가였던 앤디 워홀(Andy Warhol)은 그 자체로 사회적 아이콘이었다. 항상 잘 꾸며진 차림과 강렬한 눈빛을 가진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실제로 몇몇 기업에서는 당시에도 워홀의 작품보다는 그의 스타성과 오라에 관심을 갖고 그를 마케팅 수단으로 쓰길 원했을 정도였다. 워홀 역시 스스로 아이콘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그래서일까 워홀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담은 작업을 다수 진행했다. 그는 시대별로 자화상에 자신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담았다.

앤디 워홀 ‘자화상’(1986),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274.3 x 274.3 cm(사진=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앤디 워홀의 다양한 초상화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개최됐다. 최근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이 개최한 ‘앤디 워홀: 앤디를 찾아서’(Looking for Andy)다. 앤디 워홀의 자화상에 초점을 맞춘 이번 전시는 그의 초기작부터 1987년 사망하기 1년 전에 그린 최신작까지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소장품을 10점을 선보인다.

워홀의 초기 초상화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자아정체성이 잘 표현돼 있다. 이번 전시에서 걸린 작품 중 자신을 빨간색 그림자로 표현한 1967년 ‘자화상’ 작품이 그렇다. 이목구비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손에 턱을 괸 실루엣은 고뇌에 빠진 대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짙은 색의 커다란 안경 뒤 모습을 가린 채 등장하는 모습, 자신이 직접 고른 배경색에 따라 모습을 바꿔가며 출현하는 모습은 대중이 워홀에게 원하는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초상화 작품은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어 1970년대 초상화 제작 주문이 물밀듯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워홀은 이후 1978년이 될 때까지 10여년간 자화상을 제작하지 못했다. 1968년 자신의 작업실인 ‘팩토리’에서 한 여성이 쏜 총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응급실에 옮겨져 목숨은 구했지만, 사경을 헤멜 정도로 크게 다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에 대해 탐구를 하기 시작한다. 워홀은 이 시기 자신의 일기에 “나는 내가 정말 살아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모르겠다. 인생은 마치 꿈과 같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자화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978년 제작된 ‘초상화’ 작업을 보면 자신의 얼굴과 함께 앙상한 해골의 모습이 등장하거나, 여러 얼굴이 겹쳐진 혼란스러운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1986년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제작한 그의 대표작도 마찬가지다. 검정 배경에 자신을 보라색으로 표현한 작품 속 워홀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눈빛은 고뇌에 빠진 듯 초점이 흐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워홀의 다양한 폴라로이드 자화상도 만날 수 있다. 워홀은 “사진을 찍는 행위는 마치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며 스스로의 모습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기록하곤 했는데, 그가 사망하고 유품을 정리할 때 나온 폴라로이드 사진만 5만장이 넘는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폴라로이드 사진 10여점이 걸려 있다. 사진 속 워홀은 스스로를 남성과 여성의 모습으로 연달아 묘사하며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다루고 있다.

심지어 여장을 한 남성인 드래그 퀸(Drag Queen) 역할을 한 폴라로이드 사진도 있다. 워홀은 사회적으로 여성성을 상징하는 진한 화장을 하고 있는데, 그는 이런 자신의 정체성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관계자는 “워홀에게 내재된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만나 볼 수 있는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6일까지.

열두 개의 폴라컬러(Twelve Polacolor·1977~1986), 각 10.8 x 8.5 cm (사진=에스 파스 루이 비통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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