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저는 시방 꼭 텡븨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븨인 들녘 같기도 하옵니다. 주(主)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狂風)을 제 안에 두시든지 날르는 몇마리의 나비를 두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가니와 같이 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여진 항아리와 같습니다”(서정주 ‘기도 1’).
수화 김환기(1913∼1974)의 그림이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시를 만났다. 작품명 ‘항아리와 시’(1954). 흐드러진 매화와 단아한 달항아리가 뒤엉킨 그림에 단정한 서체로 얹은 시 한 수를 곁들인 ‘시서화’다. 요즘 한국인도 읽기 힘들어 하는 시가 아닌가. 옛 시어가 섞였고 세로로 내려쓴 구성이다. 게다가 시 내용을 은유했다는 향토색 정서 물씬 풍기는 배경. 그런데 이 작품이 한국도 아닌 홍콩에서 팔렸다.
지난 3월 29일 홍콩 센트럴 SA+에서 진행한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항아리와 시’는 2900만홍콩달러(약 39억 3000만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추정가도 공개하지 않고 현장에서 바로 부친 응찰에도 경합은 치열했다. 2200만홍콩달러(약 30억원)를 시작가로 호가를 올리더니 결국 2900만홍콩달러를 부른 응찰자에게 돌아갔다. 홍콩시장에 처음 선보인 김환기의 ‘구상화’가 작가 추상화를 제외한 부문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하며 기대 이상의 성적표를 받아낸 순간이다. ‘항아리와 시’가 낸 성과에 힘입어 서울옥션은 이날 올해 첫 홍콩경매에서 67점 중 57점을 팔아 82%의 낙찰률, 7400만홍콩달러(약 100억원)의 낙찰총액을 써냈다.
△추상·반추상에 이어 구상까지 불패?
‘수화불패’의 신화를 만들며 나오는 족족 팔리던 김환기의 전면점화가 소강상태에 든 건 지난해 4월 12일 이후. ‘고요 5-Ⅳ-73 #310’(1973)이 케이옥션 4월 경매서 65억 5000만원에 팔리며 가장 비싼 작품으로 등극한 직후였다. 2015년 후반부터 2016년 내내 경매만 열렸다 하면 기록을 갈아치우던 행진도 그 시점에서 멈춰 섰다. “100억원을 바라볼 작품” “‘고요’를 넘을 전면점화”를 찾아내는 일이 관건이라며 시장이 떠들썩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하반기부터 뜻밖의 기류가 퍼졌다. 김환기의 ‘반추상화’가 서서히 드러난 거다. 대부분 “한때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100억시대’로 가기 위한 공백을 잠시 메우는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당시까지 김환기의 최고가 반추상화는 ‘꽃과 항아리’(1957·30억 5000만원)였다. 그것도 10년 전인 2007년 11월 서울옥션경매에서 세운 기록.
까마득히 잊힌 기억 같던 김환기의 반추상화가 다시 뜬다? 조심스러운 진단은 현실이 됐다. 지난해 11월 26일 서울옥션을 통해 홍콩에 첫 진출한 반추상화 ‘모닝스타’(1964)가 2800만홍콩달러(약 39억원)를 부른 새 주인을 잡은 것이다. 반추상화의 최고가를 다시 쓴 그날 경매에선 ‘모닝스타’를 포함해 과슈작품인 ‘무제’, 혼합재료를 쓴 ‘산월’ 등 반추상이 축을 이룬 7점이 다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홍콩과 서울, 온도가 다르다
그런데 눈여겨볼 변수가 있다. 홍콩이다. 김환기의 반추상·구상화가 확실하게 ‘뜬’ 현장 모두가 홍콩이었던 거다.
지난 3월 21일 서울서 연 케이옥션 3월 경매에 출품한 반추상화 ‘남동풍 24-Ⅷ-65’(1965)는 높은 추정가 20억원까지 바라본 기대작이었다. 붉고 푸른 톤을 교차한 독특한 화면배치에다가 한때 ‘전재국 컬렉션’이란 화제성까지 더했다. 하지만 정작 낙찰가는 9억 4000만원. 이날 같이 출품한 ‘매화와 달과 백자’(1950s)는 낮은 추정가 그대로인 5억 5000만원에 마감했으며, 추정가 4억∼6억원을 걸고 응찰자를 찾은 ‘달’(1967)은 끝내 유찰되고 말았다.
|
앞서 7일 진행한 서울옥션 제147회 경매도 사정은 비슷했다. 43년 만에 출현한 반추상화 ‘산’(1958)이 낮은 추정가 8억 9000만원을 넘기지 못해 유찰됐고, 십장생의 서정성을 듬뿍 얹은 ‘영원의 노래(B)’(1957)는 낮은 추정가 30억원을 낙찰가로 삼아야 했다.
미술계의 한 전문가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국내 경매시장이 김환기 전면점화에 대한 기대를 여전히 거둬내지 못한 요인”을 꼽는다. 반면 홍콩의 시선은 훨씬 폭이 넓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홍콩에서라면 추상화에 대한 관심을 굳이 김환기에 국한할 필요가 있겠느냐”고도 반문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김환기의 반추상·구상화가 홍콩시장의 첫 진출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정서가 외국시장에선 먹히지 않을 거란 속단으로 데뷔조차 늦었던 점이 되레 아쉽다는 것이다. 이어 “한동안 단색화에만 올인하던 방향을 바꿔 국내외 양쪽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란 조언도 덧붙였다.
|
△흔들리는 ‘국내 미술품경매 최고가 랭킹’
‘김환기를 넘어 다시 김환기’란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짐은 좋다. 전면점화로만 연명하던 한국 경매시장에 숨통이 트이는 신호가 보였다. 가장 큰 공은 지난 3월 7일 서울옥션경매에서 47억원에 낙찰된 이중섭의 ‘소’(연도미상)에 있다. 8년 만에 대중 앞에 건 소그림으로 이중섭은 작가최고가를 갈아치우며 2010년 35억 6000만원에 팔린 ‘황소’(1953경)도 넘어섰다. 여기에 김환기의 반추상·구상화를 보태자 한동안 꿈쩍도 않던 ‘국내 미술품경매 최고가’ 순위는 오랜만에 ‘흔들’하게 됐다.
현재 ‘국내 미술품경매 최고가’ 1∼5위는 ‘고요 5-Ⅳ-73 #310’을 비롯해 여전히 김환기의 전면점화 5점이 싹쓸이 중이다. ‘12-Ⅴ-70 #172’(1970·63억 2626만원), ‘무제 27-Ⅶ-72 #228’(1972·54억원), ‘무제’(1970·48억 6750만원), ‘19-Ⅶ-71 #209’(1971·47억 2100만원)의 순. 하지만 6~10위는 한 점을 제외하곤 반추상·구상화에 양보했다. 이중섭의 ‘소’, 김환기의 ‘무제 3-V-71 #203’(1971·45억 6000만원)에 이어 박수근의 ‘빨래터’(1961·45억 2000만원), 김환기의 ‘항아리와 시’와 ‘모닝스타’ 등이 차례로 이름을 올렸다.
|




![[단독] “뭐라도 해야죠”…박나래, 막걸리 학원서 근황 첫 포착](https://image.edaily.co.kr/images/vision/files/NP/S/2026/01/PS26012300805t.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