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1. 요즘 은행들은 새희망홀씨 대출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이 대출은 매년 이익의 10%를 소득이 낮고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서민에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인데, 지난해 은행권 수익이 줄며 지원규모를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원을 축소하자니 서민 금융지원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한 새 정부 눈치가 보이고 늘리자니 재원을 마련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확실한 방침이 정해지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2. 서울 강동구에 사는 허 모 씨는 요즘 전세 걱정에 밤잠을 못 이룬다. 5월 말이면 계약이 끝나기 때문이다. 2년 전 1억2000만원 수준이던 전세 값은 1억7000만원까지 치솟았다. 집주인이 얼마를 올려달라고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예년 이맘때면 이사철을 앞두고 각종 대책이 나왔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없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후에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란 기대감은 접은 지 오래다. 집주인의 관대한 처분(?)만 기다리는 처지에 화가 나. 남편한테 화풀이를 해봐도 답답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 정부 조직개편 지연에 유난히 긴 정책 공백기
대선과 정권교체기 새로운 정책이 실종되고 민생 현안이 정책 당국자 관심권에서 멀어지는 ‘정책 보릿고개’에 접어들었다. 5년마다 반복되는 현상으로 대통령 권한이 막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불가피한 부분도 있다. 대부분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막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올해 정책 보릿고개가 유난히 기간이 길어지면서 국가 경제는 가라앉고 서민들의 삶도 팍팍해지고 있다.
올해 유독 오랜 정책 공백기를 겪는 원인은 총리 인선부터 뒤틀리며 인사가 꼬인 데다, 정부 조직개편 일정이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 개편안이 표류하면서 현장에서 정책을 집행해야 하는 공무원들은 모두 일손을 놓은 지 오래다.
공무원은 조직 특성상 윗선이 물갈이되고, 이에 따른 후속 인사가 마무리돼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실제 경제 컨트럴타워인 기획재정부는 새 장관 청문회 일정도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1·2차관이 다른 부처 장관급으로 자리를 옮겼고, 차관보도 청와대에 입성해 사실상 지휘부 공백상태다.
장관 후보자가 업무를 파악하고 주요 보직 인사를 끝내려면 시간이 걸리니, 빨라도 5월은 돼야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구조다. 새 정부의 아이콘으로 야심차게 출발했던 미래창조과학부는 출범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 4일 김종훈 미래부 장관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면서 새로운 장관 후보자를 물색해야 할 판이다. 청문회를 거쳐 임명되기까지 ‘장관 공백기’는 최소 한 달 이상 더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 민생 현안 챙기는 곳 한 곳도 없어
문제는 중심을 잡아줘야 할 청와대마저 조직개편안을 둘러싼 힘겨루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생이나 정책현안을 챙기는 곳이 없으니,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정도가 심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첫 청와대 비서관 회의에서 서민물가를 언급하자 그제야 정부 물가팀이 부랴부랴 움직인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정권 교체기를 틈타 가공식품이나 농산물, 공공요금이 줄줄이 올린 뒤에도 손 놓고 있다가 대통령이 직접 나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대응에 나선 셈이다. 그마저도 뒷북이나 생색용에 그쳤다는 평가가 많다.
정책 공백이 장기화하면서 우리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약하게나마 회복되던 경기지표도 다시 가라앉고 있다. 지난달 제조업 경기를 보여주는 광공업 생산은 5개월 만에 뒷걸음질쳤다.
전백근 통계청 산업동향과장은 “개별소비세 인하와 부동산 취득세 감면조치 등 정책효과가 12월 종료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정책효과로 경기의 불씨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정책효과가 사라지면서 경기에 온기가 돌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연초부터 조기 예산집행에 나서며 경기에 군불을 땠던 지난해와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 빙하기에 접어든 청년고용, 1000조원 대인 가계 빚처럼 우리 경제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문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당국은 윗선 눈치를 보며 대책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상반기 중에 하우스·렌트 푸어, 가계부채 문제 등을 해결해 나가겠다고 공언했으나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조차 불명확하다.
김선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조직 개편과 상관없이 현장 조치가 가능한 부분이 많은데 이런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며 “대통령이 직접 나서기 어려우면 총리라도 나서 공무원 조직에 위기의식을 불어넣어 움직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