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 신세계 회장 "아버지 처럼 되는게 꿈…"

조선일보 기자I 2005.05.06 07:29:49

"경영 잘 하려면 국제감각 소홀해선 안돼
이마트 국내 130개·중국 25개까지 늘릴것"

[조선일보 제공] “솔직히 말해 국내에서의 작은 성공에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국내에서 제일이 된다든지 국내 경쟁에서 이긴다든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본을 축적하여 차례차례 새로운 기업을 개척함으로써 선진 외국과 당당히 맞서 이긴다. 그것이 내가 나아갈 길이다.” 세계 경제라는 격전지(激戰地)에서 싸워야 하는 우리에게 고(故)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의 이 말은 등짝을 휘갈기는 채찍처럼 들린다. 이 회장이 20년 전에 했다는 이 말은, 그의 3남5녀 중 막내딸이자 신세계(004170) 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명희(李明熙·62) 회장이 가장 소중히 품고 있는 경영철학이기도 하다. 이명희 회장은 오는 8일 어버이날을 앞두고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기업관과 철학,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배워 기업을 우량기업으로 일군 자신의 이야기를 밝혔다. 국내외 언론을 막론하고 그가 인터뷰를 갖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본지와의 독점인터뷰는 지난 3일 강효상 산업부장이 이 회장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으로 찾아가 2시간20분 동안 이루어졌다. ―그동안 왜 한 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아버지처럼 사진찍기를 싫어해요. 남 앞에서 얘기하는 것이 자신도 없고요. (웃으며) 이번 인터뷰도 1주일 동안 연습한 거예요. 가려져 있는 것을 좋아했고, 사실 영원히 가려져 있고 싶었어요. 우리 직원들도 제 얼굴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올해는 우리 신세계로선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현재 증축 중인 본점이 오는 8월 다시 오픈하는 것을 계기로 새로운 도약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신세계는 삼성그룹에서 분리한 이후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삼성그룹에 함께 있는 동안은 신세계가 발전할 수 없었어요. 삼성의 지원은 대부분 전자나 반도체에만 집중됐지요. 그래서 오빠(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나 분리할래요’라고 말했어요. 분리할 당시 신세계는 백화점 한두 개와 조선호텔 정도였지요. 오늘날 이처럼 성장한 데에는 국제감각이 바탕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다섯 살짜리가 성인이 됐을 때는 현재 있는 직업의 90%가 사라질 것이다’는 무서운 말이 있어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마트’도 회장님이 낸 사업 아이디어였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방황했어요. 방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때 미국에서 프라이스클럽(회원제 창고형 할인점)과 월마트(할인점)를 가봤어요. 창고형 매장인데 TV가 너무 쌌어요. 50달러, 100달러였어요. 고장도 안 나고 잘 나오더라고요. 한국에서도 할인점을 해보자고 첫 매장을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전문경영인에게 전적으로 회사를 맡기십니까? “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전문경영인을 두고) 너무 나서면 웃기는 일이죠. 그러나 브리핑을 듣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나섭니다. 일하는 사람을 ‘잘 한다 잘 한다’ 하면서 치켜세워야 합니다. 경영은 맡기지만 나중에 책임은 엄중하게 물어요.” ―인재는 어떻게 키우십니까? “아버지는 인재를 나무기르듯 기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직접 면접을 보셨어요. 사람들은 아버지가 면접 때 관상(觀相)을 본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길러야 할 사람이라면 기회도 주고 끝까지 지켜봅니다. 동기부여도 하고 어떤 행동을 할까 툭 말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순발력을 보는 거죠. 남이 자기에게 반하게 하려면 자기가 먼저 그 사람에게 반해야 해요. 그러면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회사 일을 맡게 됐나요? “학창시절 제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결혼해서도 집에만 있었죠.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가 회사에 나오라고 하셨어요. ‘아버지 전 못합니더’라고 했죠. 자꾸 뒤로 빼니까 나중엔 화를 내셨어요. 여자도 앞으로는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백화점 사업을 하게 된 것은 그 분야에 소질이 있어서였나요? “모든 자식이 다 회사를 물려받지는 않았어요. 제가 분석하는 걸 좋아하고, 변화무쌍한 것, 새로운 것을 좋아하니까 백화점 사업을 맡기신 것 같아요. 한때는 6개월간 기자생활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출근 전날 아버지는 저를 불러 말씀하셨어요. 첫째가 ‘서류에 사인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책임을 피하라는 게 아닙니다.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라는 것이죠. 대신 믿지 못할 사람은 아예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무엇인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무한추구죠.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는 빨리 진행하라고 가르치셨어요.” ―아버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죠? “과거를 돌이켜보면 사연도 참 많아요. 조용필의 노래 ‘허공’을 들어보면 아버지와 저의 관계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와의 모든 약속과 사랑이 허공 속에 사라졌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는 왜 저러시지’라고 불평할 때도 전 ‘아버지처럼 해야지’라고 다짐했어요. 형제 중 저만 아버지처럼 메모하기를 좋아해요. (이 회장은 매일 쓰고 있는 메모장(다이어리)을 보여줬다. 다이어리에는 굳은 결심에서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구두 사진까지 다양한 자료와 단상이 적혀 있었다.) 제 금고 안에 이런 공책이 20권 정도 있어요. 저는 편식 습관까지 아버지를 닮았어요. 아버지는 스트레스까지 즐기셨지만 전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망가는 편입니다.” ―이병철 회장님이 반도체를 시작하려 했을 때 참모들의 반대가 많았지요? “고민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는 68세 때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서 73세 때 64K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셨어요. 병상에서 암과 투병하시면서도 반도체 실적을 보고받으셨어요. 우리보다 앞선 세대셨던 아버지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시대를 내다보셨는지, 그분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뿐입니다. 아버지는 늘 왜 우리나라에 장보고의 동상이 없는지 궁금해하셨어요.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장보고와 아버지는 뜻을 같이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에는 자주 나가십니까? “1년에 두 번 정도 유럽과 뉴욕을 다녀옵니다. 1년 이상 해외에 다녀오지 않으면 패션을 따라가지 못해요. 저는 외국을 갖다오면 완전히 바뀌어 돌아옵니다. 미국에 가면 건축에 빠지고, 미술감각도 달라져 돌아옵니다. 좋은 것을 발견하면 반드시 사진을 찍습니다. 그 물건이 몇 달 뒤엔 꼭 제 앞에 있어야 해요. 추구하지 않고 감동받지 않는 삶은 재미가 없어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는 자주 만나십니까? “남산에 운동하러 갈 때 만나요. 오빠가 가끔 집으로 오라고도 합니다. 집안 문제 가지고 의논하죠. 가족끼리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할 때 말이죠. 홍 관장(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현재 삼성미술관인 ‘리움’ 관장)하고도 친하게 지내요.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자식들 나이도 비슷하니까요. 판단 기준도 비슷해요.” ―선대 회장님과 오빠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두 사람의 성격은 아주 달라요. 물론 예민한 건 우리 셋이 다 닮았죠. 하지만 아버지는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파악하세요. 아버지는 계획적이고 통제적이시죠. 오빠는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고 철학적이며 한없이 관대하죠.”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십니까? “9시쯤 일어나서 제일 먼저 신문을 보면서 기고문, 경제·교육분야 기사 등을 스크랩합니다. 원본은 따로 스크랩하고 복사한 종이는 다이어리에 붙여요. 식사 후에는 책을 봅니다. 요즘은 책을 보면 어깨가 아파서 다른 사람보고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창조적 마인드’(하워드 가드너 지음)같이 너무 좋은 책은 직접 읽어요. 밤에는 시사프로그램 등 TV를 봅니다.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려요.(자신이 직접 스케치한 언니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얼굴과 자화상 등을 보여줬다.) 대학들어갈 때는 그림을 입학하기 위한 ‘무기’로 배웠지만 지금은 즐겨요. 앞으로 한문글씨도 배우고 싶고 펜글씨도 배우고 싶어요.”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1년 동안 8㎏을 뺐어요. 살찌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드니까 먹는 것을 방치해서인지 자꾸 살이 찌더라고요. 어느날 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번 결심한 것을 안 하면 전 입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아요. 이것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달려듭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만 먹어요. 저녁은 샐러드를 겸해서 먹고 6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먹어요. 골프와 남산을 걷는 것이 즐기는 운동입니다.” ―오는 8월 오픈하는 신세계 백화점 본점은 어떤 곳이 되길 바라십니까? “지금 한국 백화점들은 그게 그겁니다. 내 콘셉트는 차별화입니다. 손님들이 ‘신세계는 도대체 어딜 가서 이런걸 뽑아왔어?’라고 할 정도로 놀라게 해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업체에 백화점 매장만 빌려주는 임대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물건을 사서 들여 놓을 겁니다.” ―신세계 그룹이 장래에 삼성그룹을 능가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십니까? “아직 세상 끝난 것 아니잖아요? 백화점만이 유통은 아닙니다. 유통은 무궁무진한 세계입니다. 빨리 아이디어를 내서 바꿔나가는 게 중요해요.” ―언제가 가장 보람있는 때입니까? “아버지가 평가받으실 때입니다. 제가 일군 이마트도 자랑스럽지만 아버지처럼 되는 게 제 꿈입니다. 오늘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제 처지도 보람있어요. 그것은 저에 대한 브랜드 가치가 있어서 아닙니까? 하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은 대면 인터뷰를 안 할 생각입니다.(웃음)” ―신세계의 미래 비전을 말씀해주시죠. “비전이 크지요. (유명 브랜드) 아웃렛도 해야 하고, 홈쇼핑, 소프트웨어도 팔 겁니다. 이마트에서는 지금 하드웨어만 팔지만 앞으로는 컴퓨터 프로그램 등 갖가지 소프트웨어도 살 수 있게 할 겁니다. 또 세계에서 최고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2013년까지 신세계를 세계 10대 유통그룹으로 키울 겁니다. 국내에 이마트를 130개, 중국에도 이마트를 25개까지 늘릴 겁니다. “ ―그룹의 임직원들에게 어떤 당부를 하고 싶으십니까? “이 상태에서 행복을 유지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항상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제가 30대에 하루는 골프를 쳤어요. 파 포(par four) 홀에서 잘 쳐서 두 번째 샷으로 그린에 공을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공 치느라 바빠 저만 나무 밑에서 쉬었어요. 모자를 벗으며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불행이 오면 어떡하나’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행복할 때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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