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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장면 하나. 이보다 절박할 순 없다. 그물에 뒤엉킨 두 남녀가 서로에게 다가가려 버둥거린다. 허우적거릴수록 혼돈의 감정에 치감길 뿐 오도가도 못한다. 공간이 갈라놓은 두 남녀도 있다. 지구 반대편에 선 이들은 서로의 방향으로 손을 뻗어 상대를 더듬는다.
장면 둘. 이보다 절절할 순 없다. 땅콩버터잼 식빵 한 쪽이 딸기잼 식빵 한 쪽에게 노란꽃으로 마음을 전한다. 얼굴도 없고 표정도 없지만, 보인다. 이들은 행복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라면으로 만든 뗏목이 갈라지는 위급상황. 뗏목에는 달걀 반쪽씩이 타고 있다. 간격은 벌어지고 둘은 팔을 뻗으며 절규한다.
‘장면 하나’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 펼쳐놓은 광경이다. ‘사랑의 묘약: 열 개의 방 세 개의 마음’이란 주제로 꾸민 기획전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동명오페라 ‘사랑의 묘약’(1832)을 모티브 삼아 10가지 저마다의 사랑을 열어 놨다. ‘장면 둘’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 벌어진 난장판. ‘테리 보더: 먹고 즐기고 사랑하라’란 테마로 펼친 테리 보더(52)의 개인전이다. 미국의 사진작가로, 메이커아티스트로 활약하는 보더는 시리얼·식빵·감자칩·달걀·대추 등으로 만든 ‘대리인간’이 겪는 아픈 사랑을 가볍고 유쾌하게 포착했다.
닿으려고 해도 닿을 수 없는, 닿았다고 해도 닿은 것이 아닌. 이것은 사랑이다. 하나가 될 때보단 어긋날 때가 더 많고, 완벽한 성취보단 처절한 상실이 더 크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묘약을 찾고 음식으로 채울밖에. ‘한 번쯤 던져야 할 사랑’을 찾는다면 서울미술관으로 향하면 된다. ‘사랑 뭐 별거 있어?’라면 사비나미술관이다.
△‘그대와 난 이뤄질 수 없나’…고뇌하는 사랑
격렬하게 끌어안은 것도 모자라 투명랩으로 꽁꽁 싸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편치 않다. 두 남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듯하다. 무엇이 이들의 사랑을 가르고 있는 건가. 대만 출신 사진작가 신왕이 답을 내놨다. 집착이었다. 고통스러운 사랑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디 셀핑’(2014) 시리즈는 작가의 경험에서 나왔다. 몇 차례 이별을 겪고 얻은 깨달음이란다. 사랑에는 버려야 할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집착이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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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 ‘사랑의 묘약’에는 10가지 주제어가 등장한다. 일상·방황·욕망·공허·집착·신뢰·고독·용기·희생·기쁨. 전시는 그 주제어에 따라 한국·대만·미국·일본·스페인 등 10개팀이 꾸민 ‘사랑의 모든 것’이다. 신왕을 비롯해 타쿠 반나이, 이르마 그루넨홀츠, 안민정, 정보영, 신단비이석예술, 이이언&홍은희, 밥 캐리, 김현수, 홍지윤 등 주목받은 젊은 작가들이 나섰다. 회화·조각·일러스트·사진·영상 등 100여점을 걸고 세웠다.
전시는 오페라의 두 주인공이 겪는 감정의 변화를 따른다. 이들 사랑의 시작은 스페인 3D 일러스트레이터 그루넨홀츠가 잡았다. 클레이점토로 만든 모형을 촬영한 ‘커넥션’(2015), ‘허그’(2015) 등을 선보인다. 그물에 엉켜버린 두 남녀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했다. 이후 욕망과 공허, 집착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이들은 결국 신뢰라는 열쇠를 찾는다. 이때 등장한 작품은 커플아티스트인 신단비이석예술의 ‘만남’(2015), ‘만짐’(2015) 등. 뉴욕의 브루클린다리와 서울의 덕수궁돌담길, 또 타임스스퀘어와 서강대교에서 촬영한 사진을 교묘히 연결했다. 작가들이 직접 나서 두 얼굴과 두 손을 맞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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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반전은 상대의 마음을 얻게 한다고 굳게 믿는 ‘묘약’.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않나. 그런데 있었다. 묘약의 실체는 용기였던 것. 발레복 튀튀를 입은 미국남자 캐리가 나섰다. 아내가 유방암 투병을 시작하자 핑크발레복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거다. 전시는 캐리가 세계 의외의 장소에 나타나 감동을 선사한 사진작품 여러 점을 걸었다.
“남몰래 흘린 눈물이 두 뺨에 흐르네. 나홀로 갈구하는 바로 그 사랑일세.”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는 기가 막힌 선율의 아리아가 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다.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사랑은 혼자 꺼이꺼이 쏟아내는 눈물이었다. 전시는 내년 3월 4일까지.
△‘포옹하고 싶은 쿠키’ ‘이별이 싫은 달걀’…웃기는 사랑
도대체 답이 없는 게 사랑이다. 그러니 왕왕 예상치 못한 비극이 빚어지기도 한다. ‘시리얼 살인사건’ 같은. 사랑에 눈이 먼 시리얼이 정적인 시리얼을 우유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죽은 시리얼 앞에서 다른 시리얼이 무릎을 꿇은 채 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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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테리 보더는 사물에 인격을 부여해 특별한 캐릭터를 창조한다. 철사로 팔다리를 붙여 만든 ‘벤트아트’다. 그러곤 이들에게 희로애락을 연기하라고 지시한 뒤 정교한 사진촬영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충격적인 ‘살인사건’을 보면서도 실실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은 기발한 상상력 덕분이다. 숨은 이야깃거리를 듬뿍 얹은 블랙유머인 거다.
샌드위치쿠키의 사랑방식 한번 보자. 두 개로 쪼개진 쿠키 중 한 쪽이 팔을 벌려 “내게로 와”를 외친다. 배에 크림을 잔뜩 바른 그는 합체된 쿠키를 간절히 원하는 듯하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포옹’이란 작품이다. 쿠키뿐인가. 보더의 작품세계를 위해 딸기잼·땅콩잼 식빵커플(‘꽃을 건네는 마음’), 라면뗏목 위 달걀 반쪽들(‘슬픈 안녕’)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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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사랑이야기만도 아니다. 일상의 소소한 재미도 그가 즐기는 테마. 쭈글쭈글한 대추에 마스크팩을 씌우기도 하고(‘매끄러운 피부관리’), 누가 베어먹은 날씬한 사과를 거울 앞에 세우기도 한다(‘사과 다이어트’). 사회문제에도 나선다. 알록달록한 달걀무리 밖에 흰 달걀 하나가 외롭게 서 있는 ‘왕따계란’이 대표적.
전시는 보더의 첫 한국 개인전이다. 속마음을 들킨 듯 화들짝하게 하는 사진, 그 실제모델이 된 입체작품 등 90여점을 내놓고 그는 이렇게 외친다. “사람아! 사랑이, 세상살이가 너희만 어려운 건 아니다.” 전시는 12월 30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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