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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진솔한, 격 없는 리더 고기동 행안부 차관
지난해 9월 7일, 고 차관 주재로 행안부 출입기자단 첫 만찬이 열렸다. 행안부 실국장들이 대거 참석한 이 자리에서 고 차관은 단연 분위기 메이커였다. 유쾌했고 진솔했으며 격이 없었다. 앞장서 그럴듯한 건배사를 외쳤고 시종일관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띄웠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의 어린 시절 얘기부터 술술 풀어놨다. 그러면서 대뜸 “제 별명이 ‘까부남’입니다”라더니 “까페라테처럼 부드러운 남자”라고 설명했다. 행안부 간부들과 기자들 너나없이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고기동 차관은 1971년 대구 출생으로 수원고와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연세대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1994년 5급 공채(행정고등고시 38회)로 공직에 입문한 고 차관은 공직 생활 대부분을 행안부에서 근무했다. 행안부에서 지방공무원과장, 장관 비서관, 기획재정담당관, 장관 비서실장, 지역경제지원관, 정부혁신기획관, 인사기획관 등을 역임했다. 노무현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선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및 선임행정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세종특별자치시에서도 근무하며 지방 행정에 대한 이해의 폭도 키웠다. 지난 2016년 3월~7월과 2017년 7월~2019년 12월 두 번에 걸쳐 기획조정실장을 지내고 행안부에서 근무하다 지난 2022년 8월부터 1년 간 세종시 행정부시장으로 일했다. 실장급인 세종시 행정부시장으로 승진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아 행안부 본부 실장을 거치지 않고 차관으로 발탁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이 많았다.
이처럼 빠른 승진 외에도 지난해 8월 고 차관의 행안부 차관 임명은 여러 의미에서 파격 그 자체였다. 행안부에서 1970년대 생 첫 차관이 된 고 차관은 행시 기수를 무려 네 기수나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고 차관의 전임 차관인 한창섭 전 차관은 34기였고 고 차관 임명 당시 행안부 실장급이 36~37기였다.
국가 행정망 마비 사태 직후인 지난해 11월 29일 서울시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에서 고 차관을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물었다. 고 차관은 “장관님께서 잠깐 세종청사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와서 갔더니 그 얘길 하시더라.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좋다’라든가 ‘싫다’라든가 하는 그런 말은 물론 아예 말이 안 나왔다. 그러다 그냥 나왔다. 나와서 생각해 보니 20명 정도 선배들이 제 기수 앞에 있더라. 고민이 돼 장관님께 ‘다른 분 쓰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안 된다며 그냥 하라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고 차관이 이처럼 ‘파격’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깜짝 발탁된 배경은 뭘까. 당시 그의 차관 영전을 두고, 고 차관이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인 디지털플랫폼 정부와 지방시대 실현에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설명이 나왔다. 행안부 내부적으로는 고 차관 발탁이라는 일종의 충격 요법을 통해 대대적인 조직 혁신을 꾀할 필요도 있었다. 실제 고 차관 임명 얼마 후 단행된 간부 인사에서 그의 동기인 38기가 대약진하며 행안부 본부 대부분의 실장 자리를 꿰찼다. 고 차관은 “동기들이 옆에 있으니 든든하고 마음이 편하다.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으니 의견 조율도 쉽고 든든한 조력자들이 생긴 것 같다”고 언급했다.
여기까지는 고 차관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차관으로 낙점된 표면적인 이유다. 고 차관은 행안부 여느 간부들과 비교해 봤을 때 좀 색다른 이력이 있다. 대통령비서실에서만 3번을 근무했고, 실질적 행정 수도 역할을 하는 세종시에서도 3번을 근무했다.
고 차관은 “제가 비서실 같은 데서 오래 있었다. 청와대에는 참여정부 때 두 번, 박근혜정부 때 한 번 있었고 장관실에서도 비서관과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합하면 약 8년 가까이 된다. 남들과는 좀 다른 경력을 갖다 보니까 다르게 보일 수는 있겠단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유독 같은 곳에서 여러 번 중임된 이유데 대해 묻자 고 차관은 “윗분들이 쓰시기 편하셨나 봐요”라며 자신을 낮췄다.
30대 초반에 청와대에 행정관으로 처음 들어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짜장면 자리를 깔다가”라고 했다. 직원들과 짜장면을 먹다가 싹싹하게 신문지도 열심히 깔고 단무지도 펼치는 모습을 눈여겨본 한 상사가 자리가 나자 “저번에 그 짜장면 자리 깔던 애 보내”라고 해서 청와대에 처음 가게 됐다는 것이 고 차관의 설명이다. 그는 그런 자신에 대해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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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차관은 단순히 운이나 부드러운 리더십 혹은 뛰어난 사교성만 갖췄다고 될 수 있는 자리가 절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에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는 점은 그의 차관 발탁을 거들뿐이었다.
그의 출중한 실력이 뒷받침됐기에 그의 차관 발탁은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행안부 안팎에선 그의 업무 스타일이 꼼꼼하며 치밀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직원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대면 보고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일단 자료를 달라고 한다. 집에서든 어디서든 찬찬히 보다 보면 궁금한 게 많이 생기고 그것들을 계속해서 물어본다. 저도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고 질문을 하니 서로 시간을 아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고 차관이 직원들에게 늘 하는 얘기라며 기자에게 소개한 두 가지는 ‘행정은 만족하는 순간 후퇴한다’와 ‘조직은 탄생 순간부터 개혁의 대상이다’ 등이다.
고 차관은 지난해 11월 사상 초유의 국가 행정망 마비 사태 때 국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이상민 행안부 장관을 대신해 태스크포스팀(TFT)을 이끌며 사태를 무난하게 수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장관이 행정망 마비 사태가 터지자 미국에서 급히 귀국 후 사태를 수습하다 며칠 뒤 다시 영국으로 출장을 떠난 것도 고 차관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 가능한 일로 해석된다.
고 차관은 “우리 전자정부가 2000년대 초반부터 뒤는 안 돌아보고 빠른 발전만 거듭하다보니 그 사이 누적됐던 잘못된 관행들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경향이 있었다”며 “세계 일등이긴 한데 뒤돌아볼 틈이 없었고 이제서야 뒤돌아보니 허점들이 있는 것이다. 이번 기회를 반면교사 삼아 전자정부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