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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확대경]'상생금융 눈치게임', 자유시장경제 철학에 맞나

정병묵 기자I 2023.11.24 05:00:00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지난 6월 추경호 경제부총리의 ‘라면 가격 인하’ 발언이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라면 제조사가 작년에 가격을 많이 인상했는데,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내렸으니 기업들도 가격을 조정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추 부총리는 “정부가 하나하나 원가를 조사하고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면서 “이 문제는 소비자 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원맥 가격이 급등한 것은 사실이고 라면값 인상의 주요 원인은 맞다. 그러나 원맥을 가공해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업체는 놔두고 완제품을 제조하는 기업한테 소비자가격을 내리라는 게 온당하느냐는 불만이 식품업계 전반에 팽배했다. 라면업계는 결국 백기를 들었고 제과, 제빵, 제분업계까지 가격 인하에 동참했다. 고물가에 신음하는 서민들을 위해서였다지만, 수요와 공급에 따른 가격 형성이라는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근간을 부정하는 듯한 관의 지시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20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금융지주회장단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양종희 KB금융지주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 이 원장, 김 위원장, 이석준 농협금융지주 회장,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사진=연합뉴스)
최근 ‘생생금융’을 둘러싸고 금융권이 소란스럽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소상공인이 은행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은행의 이자수익 급증을 지적하면서 ‘대체 얼마를 내놓아야 하는 건가’라는 일종의 ‘눈치게임’이 벌어졌다. 일부 금융지주가 1000억원 규모의 상생금융 방안을 내놓았지만, 금융당국은 “국민들이 납득할 수준을 내놓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지난 20일 김주현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8대 금융지주 회장들을 불러 모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최근 야당을 중심으로 발의된 이른바 ‘횡재세(금융소비자보호법 개정안)’의 분담금이 2조원 규모에 달하는 것을 두고 김 위원장은 “국회에서 최소한 이 정도는 바라고 있다는 것을 지주사들이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상생금융의 규모가 횡재세를 기준으로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근래 은행이 많은 이익을 낸 것은 사실이지만 고금리 기조 장기화로 오히려 수익성을 우려해야 하는 기류도 포착되고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국내 20개 은행의 3분기 실적 자료를 통해 “국내은행의 순이익은 확대됐으나 올 들어 순이자마진 및 총자산순이익률(ROA)과 자기자본순이익률(ROE) 등 지표가 하락하는 등 수익성이 점차 둔화하고 있다”며 “고금리 상황 장기화 및 글로벌 경기회복 지연 등에 따라 향후 은행의 대손비용 부담도 증대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보릿고개가 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내놓으라는 지시를 민간기업이 이행하는 모습이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걱정되는 지점이다.

은행은 이미 공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경기 침체에 대비해 손실흡수능력을 키우고 충당금을 쌓아 놓아야 고객의 소중한 자산을 보호할 수 있다. 실제 지난 7월 새마을금고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뱅크런) 때도 시중은행의 유동성 지원을 통해 사태가 해결된 것처럼 결국 예상치 못한 위기 때는 은행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상생금융의 취지는 좋다. 하지만 라면값 인하 때처럼 정부 당국이 민간금융사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모양새가 현 정부의 국정철학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회복’과 과연 일치하는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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