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의결제도는 법 위반 혐의를 받는 사업자가 스스로 원상회복, 소비자 또는 거래상대방 피해구제 등 타당한 시정방안을 제안하면 위법 여부를 확정하지 않고 사건을 신속하게 종결하는 제도다. 하지만 도입 취지와 달리, 정작 피해자 구제에는 인색해 ‘기업 봐주기’, ‘면죄부’ 논란이 끊이지 않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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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는 지난 7일 전원회의를 열고 브로드컴 등 4개사의 거래상지위남용 건과 관련한 최종 동의의결안을 기각했다고 13일 밝혔다. 브로드컴은 구매 주문 승인 중단 등 불공정한 수단을 활용해 삼성전자가 와이파이·블루투스 등 스마트폰 부품을 3년간 연간 7억6000만달러 이상 자사로부터 구매하는 장기계약(LTA)을 맺도록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공정위가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한 뒤 동의의결안의 내용을 문제 삼아 기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하기 전 기각 처리된 사건은 8건이 있지만, 이해관계자 등 의견수렴 후 전원회의 최종 심결 단계에서 기각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총 11건의 동의의결 인용 건 중 8건이 피해기업에 대한 구제방안이 미흡하거나 부실해 시민단체, 정치권 등에서 실효성 논란을 제기했다.
공정위 안팎에서는 공정위 심사관의 협상력 제고와 동의의결제의 새 기준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긍정 평가가 나온다. 공정위 관계자는 “동의의결 개시 이후 심사관은 신청 기업과 시정방안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열세인 경우가 많다”며 “이번 기각 결정으로 동의의결 개시만으로 끝이 아닌 피해구제방안이 충분치 않다면 전원회의에서 기각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해 심사관들의 협상력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동안 동의의결은 심사관이 상정한 심사보고서가 위원회에서 그대로 통과됐다면 이번엔 달랐다”면서 “위원회 차원에서 동의의결제의 취지인 피해기업 구제에 더 높은 기준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조사-심판기능이 분리된 독립성도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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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컴의 최종 동의의결안이 기각되면서 이번 사건은 본심의 절차를 밟는다. 애초 공정위는 브로드컴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LTA 체결을 강제한 혐의로 공정거래법상 거래상지위남용을 적용해 조사하고 있었고 작년 1월 심사보고서를 상정한 상태다.
이로써 공저위는 이르면 8월, 늦어도 연내에는 전원회의를 열어 브로드컴의 거지남용 위반 여부 및 제재 수준을 결정하기 위한 본안 심의를 진행한다. 다만 전원회의 심의과정에서 혐의점이 더 드러나면 시장지배적지위남용으로 사건이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사건 조사를 다시 시작해 재심의하게 된다.
거래상지위남용은 갑의 위치에 있는 사업자가 거래상대방의 의사결정을 강요하는 행위이고, 시장지배적지위남용은 독과점 사업자가 지위를 이용해 가격을 올리거나 경쟁사의 시장 진입을 막는 행위다. 일반적으로 시지남용이 과징금 등 제재 수위가 세다.
공정위 관계자는 “당시 법 위반 행위 시점을 기준으로 거래상지위남용은 과징금이 매출액의 2%로 약 200억원 수준이며 시장지배적지위남용의 경우 3%로 300억원 정도될 것”이라며 “지금은 거거래지위남용으로 심의해도 혐의점이 더 있다면 추후 시장지배적지위남용으로 전환해 사건조사부터 다시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브로드컴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브로드컴과 공정위 조사팀 양측이 상당 기간 공개 논의 과정을 거친 후 합의한 동의명령을 승인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며 “이제 자사의 혐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호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정위에서 위법 판단이 나오면 향후 삼성전자가 민사적으로 브로드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설 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공정위의 위법 판단을 소송 때 근거로 제시할 수 있어서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번 동의의결이 인용됐다고 해도 피해기업인 삼성전자로선 피해보상을 받기 위해 민사소송에 나설 수도 있다”며 “다만 공정위에서 사건으로 전환해 거래상지위남용 등으로 제재한다면 소송에서 좀 더 쉽게 피해구제를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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