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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1984년 22세의 발레리나는 발레단 연습이 끝나면 곧장 길 건너 무용학원으로 향했다. 4개의 클래스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하루 13시간을 꼬박 쏟아야 하는 고된 일정이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피곤함도 잊었다. 딸의 유학을 위해 화양리 대폿집에서 빈대떡을 부치던 어머니와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순간도 힘들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발레를 고급예술로 생각한다. 아름다운 튀튀를 입고 무대를 누비는 발레리나는 으레 부유한 집안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랐을 거라 생각한다. 김인희(52) 서울발레시어터 단장에겐 해당하지 않는 얘기다. 한국 1세대 발레리나로 시작해 무대 위 주역으로 우뚝 서기까지 김 단장은 가난과 싸우며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무용을 시작한 후 40여년을 쉼 없이 달려온 그녀가 은퇴무대를 마련했다. 22일과 2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스페셜 갈라 & 빙(Being) 더 베스트’를 통해서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창단 20주년 기념 페스티벌 ‘브라보 SBT’의 일환으로 준비한 이 무대에서 김 단장은 무용수로서의 생활을 마무리한다. 구슬땀을 흘리며 마지막 무대준비에 한창인 김 단장을 지난 16일 경기 과천시 통영로 과천시민회관에서 만났다. 김 단장은 “무용수로서의 마무리가 조금 늦은 감이 있다”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은퇴무대에 서기로 했다. 아쉽기도 하지만 그만큼 기대도 된다”고 말하며 웃었다.
△“평생 발레하게 해줄 수 있어?”
시골에 살면서 무용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김 단장은 서울로 전학한 뒤 운동회 때 부채춤을 보곤 그 매력에 빠졌다. 형편상 학원을 다니기 어려워 친구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무용을 보곤 했다. 어느 날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를 졸라 학원을 찾았는데 사정얘기를 들은 강사가 “그냥 보내라”고 했단다. 그 한마디가 김 단장의 인생을 바꿨다. “‘무용을 시키려면 돈이 많이 드니 포기하라’고 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거다. 지금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선화예술학교에 입학한 뒤 우연히 방문한 로열발레단장의 눈에 들어 1980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에는 유니버설발레단의 창단무용수로 활약했다. 이후 ‘신데렐라’(1984), ‘호두까기 인형’(1989), ‘지젤’(1990) 등 다수의 작품에서 주역을 맡으며 무용수로서 황금기를 보냈다. 하지만 거기에는 가족의 희생이 있었다. “유학시절 집에서 한 달에 300달러씩 보내줬는데 알고 보니 어렵게 마련한 전세금을 깬 거였다. 귀국해서 보니 여섯 식구가 창문도 없는 무허가건물에서 살고 있더라.” 유니버설발레단이 최초로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기 일주일 전 뇌졸중을 앓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김 단장은 울컥했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내 뒷바라지를 하느라 건강을 못 챙긴 거다. 지금도 ‘백조의 호수’만 생각하면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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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도 활약했던 김 단장은 1995년 이젠 남편이 된 안무가 제임스 전과 함께 민간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를 창단하며 독립을 선언했다. 결혼을 결심하기 전 김 단장은 딱 두 가지를 물어봤다. ‘평생 발레를 하게 해줄 수 있느냐’와 ‘먹고 싶은 거 다 먹여줄 수 있느냐’ 였다. 어쨌건 지금껏 약속은 잘 지켰단다.
△서울발레시어터 창단공연 ‘빙’을 은퇴작으로
김 단장은 이번 공연에서 ‘빙 더 베스트’에 출연한다. ‘현존’의 의미를 지닌 ‘빙’은 1995년 서울발레시어터의 창단공연 때 올렸던 창작품. 김 단장은 그때도 지금과 같은 엔젤(천사) 역을 맡았다. 그간 발레단 일을 하느라 무대에 서지 못했던 김 단장은 4개월 전부터 맹연습에 돌입했다. 김 단장은 “무용수로 꾸준히 연습하고 공연을 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줄 미처 몰랐다”며 “다시 춤을 추니 온몸에 생기가 돈다”고 말했다.
토슈즈를 신고 마지막으로 섰던 무대는 10년 전 제임스 전이 안무를 맡은 ‘작은 기다림’. 지금도 그 아름다운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발레리나로서의 삶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행복한 여정이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내 몸짓의 울림이 잘 전해지면 좋겠다. 무용수로서는 마지막이지만 서울발레시어터는 관객과 더욱 가까이에서 멋진 발레를 선보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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