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양미영 기자] 올 여름 전 세계 가뭄과 폭염이 곡물값을 폭등시킨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그 뒤에는 또다른 힘이 작용했다. 바로 금융시장의 큰 손인 헤지펀드의 투자수요다.
이들은 곡물가격이 오를 것을 예상하고 곡물 선물을 무섭게 사들였고 이는 곡물 값을 더욱 폭등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헤지펀드 수요가 실제 곡물이 필요해 사들이는 실수요가 아니라 가격 상승을 노린 투기 목적이 강하다는 점이다.
미국 가뭄이 심화되면서 곡물 현물 값이 크게 올랐지만 옥수수 선물 값도 두 달여 사이 50%나 급등했다. 투기성격이 더 강한 옵션시장에서 역시 상승 베팅이 폭발적으로 몰리며 가격이 크게 뛰었다. 한 때 8달러를 돌파하며 사상최고치를 갈아치웠던 옥수수 가격은 연말에 9~10달러를 넘나들 것이란 전망이 파다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달 초 시카고상업거래소(CME)에서는 오는 12월에 부셸당 9~10달러에 옥수수를 매입할 수 있는 콜옵션 거래 규모가 한 달 사이 13배나 껑충 뛰었다.
실제로 가뭄이나 폭염 같은 계절적 영향이 곡물 수급에 영향을 주면서 가격을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이같은 파생상품 거래가 폭증한 것도 곡물가격 급등락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투기적 세력이 가격을 좌지우지하면서 곡물 가격이 실제 가치보다 훨씬 더 부풀려져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곡물 관련 선물 거래에서 실제 농산물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98%는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적 자본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농산물 거래에서 헤지펀드가 투자하는 자금이 2005년 350억달러 규모에서 최근 2000억달러까지 급증한 것으로 추정했다.
헤지펀드 자금의 경우 실수요가 아니기 때문에 시장이 가라앉을 조짐을 보이거나 가능성이 제기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이는 결국 곡물값 폭락을 야기하며 또다른 시장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시장 관계자들은 “미국 정부가 에탄올 생산 규제 등을 완화하는 등 조치를 취하면 곡물값이 급격히 꺾이면서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헤지펀드 외에도 카길 등으로 대표되는 곡물업체들을 주도로 시장에서 독과점이 형성되면서 곡물가격을 부풀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들 업체들의 곡물유통량은 전 세계 유통량의 80~90%를 차지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들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올해 들어 정부가 농산물 관련 파생상품 판매를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업계의 로비와 반대가 만만치 않아 국제적 차원에서 규제가 확대되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