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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3294억원. 결승선까지 전력질주한 뒤 돌아보니 찍힌 기록이다. 3000억원은 넘기지 않을까 했던 추정도 눌러버렸다. 뚜껑을 열어보니 300억원 가까이가 더 붙어 있다.
지난해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경매역사를 통틀어 최고다. 서울옥션·케이옥션을 포함해 마이아트옥션, 아트데이옥션, 아이옥션, 에이옥션, 칸옥션, 꼬모옥션 등 국내 8개 경매사가 1월부터 12월까지 온·오프라인 미술품 경매를 통해 낙찰시킨 총액이 3249억원.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와 아트프라이스가 결산한 이 수치는 2020년 1153억원에 비해 2.8배 이상 늘어난 거다. 사실 2020년 경매시장이 역대급 ‘바닥’이었던 터라 비교에 큰 의미는 없다 쳐도, 2019년 1565억원, 2018년 2194억원, 2017년 1900억원, 2016년 1720억원, 2015년 1880억원 등에 비춰도 가히 압도적인 규모라 할 만하다.
지난 한 해 동안 경매시장에 나온 미술품은 총 3만 2955점. 이 중 2만 2235점이 팔려 67.47%의 낙찰률을 기록했다. 수직상승 거래액만큼이나 출품작 수도 늘어난 건데, 2020년 3만 276점(낙찰률 60.61%), 2019년 2만 5962점(66.55%), 2018년 2만 6290점(65.33%), 2017년 2만 8512점(65.32%) 등과 비교해봐도 그렇다. 최근 5년래 가장 많은 수의 미술품이 출품해 가장 많이 낙찰됐다는 얘기다. 결국 때를 엿보던 미술품이 지난해 쏟아져 나왔고 그에 화답하듯 무섭게 팔려나갔다는 뜻이 된다.
◇이우환·쿠사마가 평정한 경매시장…우국원 낙찰률 100%
미술시장을 뜨겁게 달군 ‘뭉칫돈’의 공세는 경매시장의 상승세를 견인한 작가군에서 엿볼 수 있다. 컬렉터의 애정 공세를 무더기로 받은 압도적 순위의 작가로는 이우환(86)과 쿠사마 야요이(93)가 꼽힌다. 이우환은 낙찰총액 1위 작가로, 쿠사마는 최고가 낙찰작 1위 작가로 각각 이름을 올렸다.
지난 한 해 경매에서 팔려나간 이우환의 작품 거래총액은 394억원 8774만원어치에 달한다. 507점이 나왔고 414점이 새 주인 품에 안겼다(낙찰률 81.66%). 이우환은 2020년에 이어 연거푸 낙찰총액 정상에 등극했는데, 그해 거래액이 149억 7000만원이니 무려 245억원어치가 더 팔려나간 셈이다. 이우환의 이번 성적은 2018년 김환기가 기록한 ‘최고 낙찰총액’ 354억 7000만원도 뒤엎었다.
쿠사마 역시 만만치 않다. 낙찰총액 365억원. 이어 김환기가 214억원을, 김창열이 200억원, 박서보가 196억원을 써냈다. 10위권 중 단연 눈에 띄는 작가는 불현듯 ‘경매스타’로 떠오른 우국원(46)이다. 48억원으로 순위는 10위지만, 64점을 출품해 64점을 팔아낸 낙찰률 100%로는 단연 톱이다. 우국원을 앞세워 문형태(22위), 최영욱(23위), 하태임(27위) 등 지난해 경매시장은 젊은 뉴페이스가 도드라졌다.
개별 낙찰가격으로 매긴 ‘최고가 낙찰작 1위’에 쿠사마를 등극시킨 작품은 ‘호박’(1981). 지난해 11월 서울옥션에서 54억 5000만원에 팔렸다. 쿠사마 역시 2년 연속 같은 타이틀을 꿰찼다. 2020년에는 인피니트네트 시리즈인 ‘소울 버닝 플레이스’(1988)가 약 27억 8800만원에 팔리며 최고가 낙찰작이 됐다.
쿠사마의 기세는 그저 1위 한 점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최고가 낙찰작’ 30위권 내에서 9점, 10위권 내에는 무려 5점을 올린 거다. 특히 무한점 시리즈가 우세를 보였다. 2위 마르크 샤갈의 ‘생 폴 드 방스의 정원’(1973·42억원), 3위 김환기의 ‘1-Ⅶ-71 #207’(1971·40억원), 6위 이우환의 ‘동풍’(1984·31억원) 등 사이사이로 인피니트네트 연작을 ‘색깔별’로 포진시켰다. 쿠사마 외에도 이우환의 작품이 30위권 내 7점 들어, 쿠사마와 이우환의 작품만으로 50%(16점)를 채울 만큼 두 작가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전체 미술시장, 2007년 6045억원 기록 넘는다…과열현상 우려도
경매시장의 화끈한 상승에 힘입어 국내 미술시장 규모는 1조대 전망이 무색하지 않게 됐다. 전체 미술시장에서 경매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30% 안팎. 여기에 화랑·아트페어 등으로 거둔 매출액이 합쳐져 미술시장 전체규모가 나오는데, 한국 미술시장은 지난 14년간 5000억원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실제로 국내 미술시장은 2007년 6045억원으로 정점에 오른 뒤 추락을 거듭하다가 2013년 3249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그나마 서서히 회복해 끌어올린 2017년의 4942억원이 최고였다. 하지만 ‘5000억 미술시장’에 대한 기대감만 부풀린 뒤 2018년 4482억원, 2019년 4146억원으로 다시 내리막길에 만났더랬다. 최악으로 기록될 2020년 미술시장 통계는 아직 내놓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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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에선 “새해에도 이어질 미술시장의 강세”를 의심하지 않는다. 한 전문가는 “당분간 이우환·쿠사마 등 고가의 작가들이 점하는 절대 우위가 지속될 것”이라며 여기에 더해 “미술시장의 바로미터로 여겨온 김환기의 점화 대작이 아직 터지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더 큰 장의 가능성이 있다”고 점쳤다. MZ세대가 새로운 수요층으로 부상하며 급물살을 탄 세대교체 바람 역시 쉽게 잠재우지 못할 거란 점도 작용했다.
다만 과열현상에 대한 우려가 없진 않다. 김영석 미술시가감정협회 이사장은 “경매를 중심으로 일부 젊은 작가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이 자칫 미술품 투기의혹으로 확산할 조짐을 보인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는 ‘2차시장인 경매시장이 화랑·아트페어 등 1차시장에 되레 영향을 미치는 이상현상’에 대한 염려와 맞물린다. 여기에 현대미술품에 대한 비상한 관심으로 눈밖에 밀려난 고미술품 시장에 대한 우려도 생겼다. 한 전문가는 “2007년 급하게 치솟은 뒤 바로 폭락한 시장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며 “당장의 큰 성장보다 일단 올라선 시장의 규모를 유지하며 내실을 다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