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회담 이후 1년. 북한과 미국은 이후에도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차례 더 정상회담을 가졌으나 공동선언문조차 내지 못하고 결렬을 선언했다. 기대와 열망은 어느새 식었고 과제와 인내심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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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트럼프 “좋은관계” 입모아…남북미 협상라인도 ‘드림팀’ 평가
2차 정상회담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해서 1차 정상회담의 의미까지 평가절하 할 필요는 없다. 70년이 넘는 적대의 역사를 극복하고 북한과 미국 정상이 만났고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북한은 미국의 협상 의사를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6·12싱가포르 회담은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북한과 미국은 양국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계에 대해서는 ‘좋은 관계’라며 양 정상의 궁합(케미스트리)을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일(현지시간)에도 “적절한 시점에 김 위원장을 만나기를 고대한다”며 “김 위원장은 협상을 하고 싶어하고, 나도 그와 협상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초 북한의 연이은 단거리 미사일 도발에 대해서도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는 없었다’며 북한을 감싸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했다. 다수의 미국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통해 미국에 메시지를 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밝혔으니, 북한의 전략적 도발을 알고도 덮고 넘어간 셈이다. 그만큼 ‘대화의 틀’을 깨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는 의미다.
북한 역시 최근 미국 정부가 북한 화물선 ‘와이즈 어니스트’호를 압류하자 대미 비난을 재개했으나 6·12 공동선언과 북·미 정상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건드리지 않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도 미국 대통령과 직접 만나 협상을 진행하고 공동선언을 이끌어 낸 만큼 6·12 공동선언이 실패가 아닌 업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상황을 관리하는 것으로 읽힌다.
북·미 협상에 정통한 한 정부 당국자는 “현재 미국의 협상팀, 폼페이오 국무 장관과 비건 특별대표는 역대 어떤 라인보다 북한에 대한 이해도나 협상 의지가 높다”며 “북한으로서는 미국과 협상을 할 수 있는 적기라는 의미다. 북한측도 계속해서 이 일을 해온 사람들이니만큼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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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건은 비핵화 협상…정부 안팎서 ‘기회의 창’ 강조
북·미 정상이 서로에게 우호적인 것은 고무적이나, 비핵화 협상의 진척 없이는 이같은 좋은 관계 역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현 시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이나 트럼프 대통령 모두 서로를 협상 파트너로 여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이는 언제든 필요에 따라 적대적으로 돌아설 공산이 크다.
양측은 싱가포르 회담을 통해 △북·미 관계 정상화 △평화체제 보장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전쟁 포로 송환·실종자 유해복구 등 4개 항에 합의했다. 당초에는 합의문 상 1항부터 순서대로 추진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으나 하노이 회담을 겪으면서 비핵화 합의 없이는 관계 정상화도 평화체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북·미 협상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가장 큰 원인이 양측간 ‘신뢰’ 문제인 만큼, 양측이 생각하는 핵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문제 역시 진전되지 않는 것이다. 신뢰 관계가 탄탄한 상황이라고 해도 국가간 관계에서 완벽하게 어느 한쪽이 원하는 방향으로 협상이 이뤄지기는 힘들다. 하물며 북한과 미국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해온 적대의 역사가 깊고 국력의 비대칭이 현저하다. ‘핵’을 유일한 무기이자 협상의 카드로 들고 있는 북한이 미국이 원하는 완전하고 돌이킬수 없는 비핵화를 먼저 이행하고 미국의 호의를 기다릴 수 없는 이유다. 미국 입장에서는 비핵화 조치 없이 북한이 원하는 제재 완화를 먼저 해 줄 경우 북한이 ‘몰래’ 핵 개발을 이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9·19 공동성명 이후 사태 등 역사적인 경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측 북핵 수석대표인 이도훈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은 지난달 30일 열린 제주포럼 기조연설에서 “각국은 자국의 국내 정치와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며 “이는 ‘기회의 창’이 무기한 열려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적기’를 놓쳐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본부장은 대북 제재 이행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북핵 문제는 제재와 압박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제재라는 ‘길’(path)을 계속 걸어도 대화라는 ‘문’(door)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북핵 문제 해결이 있는 ‘방’(room)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