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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최정훈 기자] “7남매나 되는 집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간 친구가 시누이 중에 네 살 베기한테는 도무지 아기씨라는 말이 안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아기씨보다는 이름을 부르는 게 낫겠다고 하니 친구의 어머니가 저더러 `시고 떫은 얘기하지 마라`며 `우리도 다 그렇게 살아왔어`라고 핀잔을 주시더군요.”
1966년 2월1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윤형원씨의 기고문이다. 이 후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족 내 호칭 문제는 이 땅에서 뜨거운 감자다. 최근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 여성들이 가족 호칭 문제가 성 불평등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전문가들은 성평등 의식이 높아진 현대 여성들이 가족 호칭에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며 연일 최저 혼인율을 갱신하는 상황에서 가족 내 불평등 요소를 해소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젊은 미혼여성 가족 호칭 개선 요구 강해…“문제의 당사자기 때문”
여성가족부는 지난 1월28일부터 2월22일까지 국민권익위원회 온라인 참여 플랫폼인 `국민생각함`을 통해 가족호칭에 대한 국민생각 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는 초기부터 시스템이 마비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총 참여인원이 3만 8564명에 달했다.
조사 결과 `남편의 동생은 도련님 혹은 아가씨라고 높여 부르는 반면 아내의 동생은 처남 혹은 처제로 낮춰 부르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문제가 있다`고 답한 응답자가 98.4%에 달했다. `결혼한 여성은 배우자의 부모님 댁을 시댁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결혼한 남성은 배우자의 부모님 댁을 처가라고 부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도 96.8%가 문제가 있다고 대답하는 등 대부분 항목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이한 점은 20대와 30대 미혼 여성의 조사 참여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점이다. 20대와 30대 참여자는 전체의 89.1%를 차지했다. 또 전체 참여자 중 3만 4629명이 여성이었고 남성 참여자는 3935명에 불과했다.
실제로 똑같은 질문을 남녀 비율이 비슷한 상황에서 하면 결과는 큰 차이가 난다. 지난 2017년 국립국어원이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남성 2023명, 여성 1977명으로 비슷한 참여율을 보이자 도련님 아가씨 처남 처제 호칭의 개선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65.8%에 그쳤다. 또 젊은 세대에 비해 고연령 세대도 성 불평등을 느끼는 비율이 적었다. 지난 1월 오마이뉴스가 리얼미터에 의뢰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련님 vs 처남` 가족 호칭의 성차별성에 대한 국민 인식에 대해 50대와 60대는 남성과 여성 모두 절반 이상이 성차별적이지 않다고 대답했다.
전문가들은 젊은 세대 여성들이 가족 호칭에 대해 성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신지영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는 “올케·도련님·시댁 등 가족 호칭 문제는 모두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을 통해 새가족 구성원이 되는 여성에게만 한정된다”며 “당사자가 소수인데다 가족 내 변화를 일으킬 힘이 전혀 없다는 게 50년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어 “힘 없는 개인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불편함을 감당하게 되고 언어의 습관적인 사용으로 문제의식에서 무뎌진다”며 “나이가 들어 다른 여성을 새 가족으로 맞이하면 관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 더 이상 자신의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불편하면 만남을 꺼리게 되고 결국 소통의 부재와 갈등을 부르기 마련”이라며 “가족 내 호칭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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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공론화로 불평등 가족 호칭 개선할 것”
정부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가족 호칭의 성 불평등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여가부 주최로 가족 호칭 토론회가 열기도 했다.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은 이날 성 불평등을 해소할 가족 호칭 사례 당선작을 공개했다.
장인어른·장모님과 시아버님·시어머님 대신 모두 `어머님·아버님`으로, 도련님보다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개선안으로 뽑혔다. 시댁을 시가로 바꾸자는 사례도 나왔는데, 남편의 집만 시댁으로 부르고 부인의 집은 처가로 낮춰 부르는 것을 고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가족 호칭 개선 논의 때마다 나왔던 올케, 아가씨와 같은 표현도 `새언니`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다만 여가부는 강제성 있는 가이드라인 등을 제시하지는 않을 방침이다. 여가부 관계자는 “정부가 언어 사용을 강제한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는 않을 방침”이라며 “다만 현재 성 불평등한 단어에 대해 대안 등을 제시하고 공론화 과정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도 “지난 2006년 여성민우회가 호칭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열었을 때와 비교하면 현재 국민의 의식 수준은 상당히 높아졌다”며 “호칭 개선은 정부 지침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국민적 공감을 통한 개선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