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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어진 이들과 함께한 행복 걷기

최은영 기자I 2019.05.03 05:00:00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필자는 요즘 주위에서 과분한 칭찬을 자주 듣는다. 450년 전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을 재현하기 위해 지난 달 9일부터 21일까지 12박13일 동안 서
울 봉은사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충주댐 수몰구간을 제외한 약 270km를 70대 중반의 몸으로 재현단에 끼어 끝까지 완주한 것을 두고 하는 말들이다. 행사를 처음 발의하고 직접 단장을 맡아 퇴계 후손과 제자들 후손 그리고 연구자와 도산서원 관계자 등 다양한 인사들로 재현단을 구성하여 큰 탈 없이 마무리한 점도 한몫 거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가당치 않은 과찬이다. 필자가 한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열흘 이상 하루 종일 걷는 일도 실제로 해보면 그렇게 힘들지 않다. 날마다 농사짓거나 건설현장에서 노동하는 것 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일정 중간 중간 퇴계 선생의 삶을 조명하는 강연회와 시낭송회도 10여 차례 진행했는데, 걷기를 끝내고 저녁에 이런 문화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고단한 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참여한 지역민들이 퇴계 선생의 향기 나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는 것을 보노라면 육체적 피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늘 말끔히 씻겼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이번 일을 추진하면서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나 아주 행복했다.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행사를 주관한 ‘도산서원참공부모임’ 회원들의 헌신적인 봉사이다. 퇴계학을 더 깊이 공부하여 퇴계 정신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서 2015년 11월부터 두 달에 한 번 1박2일로 도산서원에 모여 공부하는 모임의 멤버들인데, 동양철학과 한문학 분야 60대 중·후반 학자들이 주축인 이들은 행사가 발의되자 즉각 호응하여 마치 자기 일처럼 모두 발 벗고 나섰다. 기본계획 수립 단계부터 문헌을 확인하고 차량과 도보로 여러 차례 사전답사를 하였으며 각종 자료를 만드는 일에도 적극이었다. 뿐만 아니라 숙식을 제외한 모든 경비를 각자 부담하였고, 함께 걸으니 행복하다며 강연과 해설도 무료로 봉사하였다.

그런 모습은 바로 행복 바이러스로 번져 이들의 가까운 지인들 역시 무료로 강연과 해설을 자청하고 먼 곳도 마다하지 않고 동참해주었다. 여기에는 이름을 대면 모두 알만 한 미술평론가, 칼럼니스트, 화가, 공연운영자도 들어있다. 이들의 참여로 귀향길 재현행사의 분위기도 한껏 고조되곤 하였다. 또 일정을 함께 한 유명 동양화가 한 분은 멋진 풍경화와 인물화를 채색하여 보내왔고, 또 다른 분은 전혀 예상치도 않은 야외 시낭송행사의 설치비용을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먼저 제안하고 관철하였다.

연도의 지방자치단체도 적극 도움의 손을 내밀어 새벽 출발 시간에 행렬을 격려하며 전송한 시장님도 있었고, 평소 사용을 제한하는 정자를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행사의 뜻을 살려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시장님도 있었다. 개막 장소를 기꺼이 빌려주면서 퇴계 정신을 배워 실천해야 한다고 환영사를 해준 봉은사 주지 스님과 내년에는 자신도 참여하겠다는 도산서원 인근 용수사 주지스님에게서 종교의 경계를 넘어 소통과 화합의 한줄기 희망을 보았다.

끝으로 고마움을 표할 데는 언론이다. 3월 중순의 설명회 이후 일반 참여자가 늘어난 것은 전적으로 ‘퇴계의 마지막 귀향길 따라 걷는다.’,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다루어 준 언론의 열띤 보도 덕분이었다. 이후에도 끝날 때까지 잇따라 보도해준 데 힘입어 일반 참여자가 갈수록 늘어났다. 그 결과 매일 30~50명이 함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소원한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을 그리며 나선 길에 이들 ‘어진 사람들’의 향기가 봄날 매화향처럼 짙게 퍼져 나갔다.

퇴계 선생은 일찍이 도산십이곡 제3곡에서 순박한 풍속과 사람의 착한 본성에 대한 믿음을 이렇게 읊었다.

‘순풍이 죽었다 하니 진실로 거짓말이며 / 인성이 어질다 하니 진실로 옳은 말이니 / 천하에 허다한 영재를 속여서 무엇 하리오.’

퇴계 귀향길 재현행사에서 어진 분들을 많이 만난 것도 이런 믿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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