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전한 농민 실상, 가치 있어"…'동학농민군 편지' 문화재 됐다

이윤정 기자I 2022.02.15 05:00:00

본인의 구명 요청하는 내용
"한글로 써 있어 당시 생활 파악에 도움"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제번하고 모자 이별 후로 소식이 서로 막혀 막막하였습니다. 남북으로 가셨으니 죽은 줄만 알고 소식이 없어 답답하였습니다. (중략) 돈 300여 냥이 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 주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몸에 혹 유고 계시거든 옆 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 中)

동학농민군 한달문(1859~1895)이 쓴 ‘동학농민군 편지’가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전남 화순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나주 감옥에 수감 중이던 한달문이 고향의 모친에게 직접 쓴 옥중 한글 편지 원본이다. 본인의 구명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고상’(고생), ‘깊피’(급히), ‘직시’(즉시) 등 전라 방언의 특성이 담겨 있고, 당시 동학농민군의 처지와 실상을 살필 수 있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14일 이데일리에 “지금까지 농민군들이 주체가 돼 기록한 문서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며 “관군이나 토벌군, 관료 등 농민군 반대편 사람들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해석해왔는데 이번 편지는 농민군이 직접 썼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까지 동학농민군이 쓴 편지로 확인된 사료는 2건이다. 그 중 양반가 자제인 유광화(1858~1894)의 ‘동학농민군 편지’는 지난해 문화재로 등록됐다. 그가 필요한 군자금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연구조사부장은 “유광화의 편지는 한문으로 써 있고, 한달문의 편지는 한글로 써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며 “한글 편지이기 때문에 실제 농민군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파악하는데 더욱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부연했다.

한달문은 화순과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이끌다가 나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쫓기는 신세가 됐다. 1894년 12월 나주 동의면에서 체포된 후 12월 20일 나주 감옥에 수감됐다. 모진 매질과 고문을 받다가 어머니에게 구명을 요청했고 집안에서 급히 돈을 마련해 구해냈으나, 집에 온 지 이틀 후인 1895년 4월 1일 장독(곤장을 심하게 맞아서 생긴 독)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이 부장은 “2004년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유족을 등록하는 과정에서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후손이 가지고 있던 편지를 2017년에 기증받았고, 5년 만에 문화재로 인정받게 됐다”고 과정을 설명했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고종 31년(1894)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 등 동학교도와 농민이 합세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 등 탐관오리의 횡포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들불처럼 번졌다. 동학농민운동이 거세지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일본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보내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한달문의 ‘동학농민군 편지’(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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