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가은 기자] 손에 쥔 사탕 하나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던 90년대. 온종일 마당에서 수건을 망토처럼 두르고 나무 막대기를 검 삼아 뛰노는 일이 하루 일과였던 당시 기자에게 세상은 흑과 백 뿐이었다. 천사와 영웅은 선, 악마와 마왕은 악. 지하철에서 어르신들께 자리를 양보하던 부모님은 선, 길에 쓰레기를 버리고 걸어가며 담배를 피우는 어른들은 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때로는 나빴고, 나쁘다고 여겼던 것들도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다. 삶은 참 모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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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라스트 △쓸개 △왈퐈 △로렌스를 구해줘 △CELL 등을 연재한 그는 많은 독자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가 신작을 낼 때마다 독자들은 “형규형 신작? 이건 믿고 보는 거지”라는 반응을 내보인다.
최근 강형규 작가는 카카오웹툰에서 월요일마다 신작 ‘블록(Block)’을 연재 중이다. 영적 현상인 ‘빙의’와 살인청부업에 뛰어든 여학생, 부동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블록은 여타 작품들처럼 작가가 직접적으로 주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사건과 인물들간의 관계성을 통해 유추할 따름이다.
△웹툰 작가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학창 시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과 누나가 있었는데 음악과 영화를 좋아했었어요. 저도 홍콩 영화나 팝송을 많이 듣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자랐어요. 그러다보니 대학을 못 간 상황에서 뭘 할지 고민을 하다가 뭔가 표현하는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화를 제일 잘하고 좋아해서 20살에 ‘영챔프’라는 만화 잡지에서 데뷔를 했죠. 최근에 연재했던 ‘라모스카’도 원래 영챔프 때 그렸던 만화인데 그때 정서를 새롭게 만들어낸 리메이크작이에요. 본격적인 내용은 라모스카 시즌2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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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는 없습니다. 예전에는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었는데 요즘은 결과를 주고 독자분들이 알아서 느끼시기 바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꼽아본다면 인간의 이율배반성을 만화라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인물들 간의 감정선도, 입장차도 계속 바뀌죠. ‘로렌스를 구해줘’ 이후부터 명징한 선악 구분이 딱히 없어졌어요. 블록도 마찬가치입니다. 연재 중이라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조상신이나 귀신들이 마냥 좋은 것만 주지도 않고 나쁜 것만 주는 일도 없다는 걸 담고 있어요.
△평소 영감은 어디서 얻으시나요.
-신작을 만들 때는 전작의 보완해야 할 점들을 찾아 만듭니다. 첫 번째 기조는 비슷한 걸 만들지 말자. 강형규 만화라는 느낌이 계속 날 수밖에 없는데, 장르나 내용들이 자꾸 중첩되면 자기 복사가 돼버리니 억지로라도 장르를 바꾸려고 했어요. 이전의 저와 반대되는 방식으로 얘기를 만들려고 노력하죠.
△연재하실 때 힘드신 점은 없으신지요.
-완전히 재미 위주로 만화를 그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지금 그리고 있는 블록은 더 재미 위주로 가려고 하고 있어요. CELL, 라스트, 왈퐈, 로렌스를 구해줘 전부 재미 위주로만 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한번은 바꾸고 싶어요.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좀 지나서는 이름을 바꿔서 나갈까 싶기도 해요. 연출 스타일도 바꾸고. 근데 사람들이 내 만화인 줄 알게 되면 안타까울 것 같은데요(웃음).
△작가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왈퐈 연재를 시작할 때는 아이가 없었어요. 도중에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마지막 화까지 5개 분량 정도 남겨놨을 때, 가장 클라이맥스에 있을 때 아이가 태어났어요. 마감을 다 못한 채로 탯줄을 자르고 그랬었죠. 그런데 왈퐈에서 그리고 있던 장면이 주인공의 아들을 죽인 놈을 대면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때 제 삶의 태도가 바뀌었어요. 당시에는 항상 좀 차갑게 만화를 만들자. 뜨겁지 말자가 기조였거든요. 애를 낳고 나서는 좀 더 뜨거워졌어요. 급기야 로렌스를 구해줘부터는 세상 모두가 악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죠. 지금은 뜨거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예요.
△독자들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운이 좋아서 20년 가량 만화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 만화를 차갑게 콘트롤해서 명징한 메시지를 보여주려고 했고, 일정 기간 이후부터는 독자분들이 알아서 해석하게끔 풀어주는 방식으로 변화했는데 이것도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끝까지 ‘이게 맞나’라는 생각을 갖고 스스로를 몰아넣고 싶습니다. 또 마지막까지 만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보다는 죽을 때까지 완결성 있는 준수한 작품들을 50개 이상 만들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이데일리 독자 또는 팬분들께 하고 싶으신 말씀은.
(모든) 만화를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독자분들에게 가장 멋있게끔, 평생 그릴테니 만화적 언어를 사랑해주세요. 그것이 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