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트라우마와의 싸움[BOK워치]

최정희 기자I 2023.08.22 05:00:00

올해 주요국 금리 인상의 끝물…각자도생으로 전환
주요국 중앙은행, 트라우마에 정책 전환에는 ''신중''
美,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스탑앤고'' 함정
日, 섣부른 긴축에 디플레이션 공포
韓, 환율 급등 등 대외 변수에 취약
물가와의 전쟁서 승리 아직인데 ...

[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작년에는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으로 일제히 정책금리를 인상했다. 올해는 금리 인상도 끝물에 접어들었다. 우리나라는 올해 1월을 끝으로 금리 인상을 멈췄고 미국은 9월에 금리를 올리냐, 마느냐를 놓고 논쟁 중이다. 반면 작년 완화적 통화정책을 폈던 일본은 수익률곡선제어(YCC)를 서서히 조정하며 정책 전환 신호를 보내고 있다.

금리 인상기를 종료하는 나라든, 일본처럼 장기간 완화정책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나라든 정책 전환기에는 각국 중앙은행들의 트라우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번처럼 수십 년 만의 인플레이션으로 기록에 남을 만한 대대적인 금리 인상이 있었던 시기라면 중앙은행들은 정책 전환에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물가는 덜 잡은 것 같은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 중국 경기는 크게 휘청이고 있어 중앙은행으로선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사진=AFP)


◇ 美, 1970년대 ‘물가 잡은 줄 알고 금리 내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트라우마가 있다. 1973년 10월 1차 오일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정책금리를 1972년 3% 수준에서 1974년 13% 수준으로 높였으나 경기 침체 우려가 번지자 금리를 1977년까지 4% 수준으로 내렸다. 그러다 1978년 2차 오일쇼크가 오자 다시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지만 통화정책의 파급 시차를 고려하면 온탕과 냉탕을 반복했던 셈이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연준을 ‘샤워실의 바보’라고 칭한 것도 이때였다. 샤워실에 뜨거운 물이 빨리 나오도록 수도꼭지를 온수 방향으로 급하게 돌렸다가 너무 뜨겁자 다시 냉수 쪽으로 방향을 트는 등 섣부른 조치가 불러온 부작용에 대한 지탄이다. 당시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을 만든 것은 국제유가 급등이 아니라 통화량의 팽창이라고 지적했다. 이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1980년 등장한 폴 볼커 연준 의장은 1981년 금리를 20% 넘게 올려야 했다. 그 결과 미 경제는 1982년 마이너스(-) 4%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연준은 이번에도 ‘뒷북 금리 인상’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2021년 후반까지도 인플레이션이 ‘일시적(temporary)’이라고 평가해 금리 인상을 작년 3월에서야 시작했다. 저물가 시대에 대비해 2020년 도입했던 평균물가목표제(AIT)가 연준의 금리 인상 시작점을 늦추는 계기가 됐다. 기대와 달리 코로나19를 기점으로 고물가 시대가 도래해 AIT 도입 자체가 잘못됐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24일(현지시간) 잭슨홀 회의에선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중립금리 추정치 상향을 발표할 것이라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가 나왔다. 1970년대 금리를 인상하다가 인하했던 ‘스탑앤고(Stop and go)’ 함정에 이어 뒷북 금리 인상까지 고려하면 연준은 금리 인하로 쉽게 정책을 전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연준이 1년 4개월간 금리를 5.25%포인트나 올렸음에도 고용시장 역시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사진=AFP)


◇ 日, 긴축했다가 디플레 극복 실패했던 경험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가 4월 취임한 이후 BOJ의 통화정책이 긴축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으나 이러한 기대가 점점 얕아지고 있다. BOJ는 작년 12월 수익률곡선제어(YCC)의 기준선이 되는 10년물 금리를 ±0.25%에서 ±0.5%로 조정했고 7월에는 10년물 금리 상한을 1%로 올렸다. 그럼에도 BOJ는 이는 긴축이 아니라 완화적 통화정책을 지속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BOJ가 통화정책 전환에 신중한 이유는 정책을 긴축으로 전환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BOJ는 2000년 8월 제로금리에서 탈피해 금리를 소폭 올렸는데 닷컴버블이 터졌다. 2006년 3월에는 양적완화를 중단했는데 그 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BOJ가 긴축에 나서려고만 하면 전 세계적으로 버블이 붕괴되고 금융위기가 터지는 터라 다시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내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한국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BOJ는 과거 통화정책을 긴축으로 전환한 이후 디플레이션 탈출에 실패한 경험 등을 바탕으로 정책 기조 전환에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은 1980년 이후 장기간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세)을 겪은 만큼 작년과 올해 물가상승률이 2%를 넘더라도 정책 전환에 신중한 모습이다. 실제로 BOJ는 내년과 내후년 물가 전망치를 각각 1.9%, 1.6%로 내다보고 있다.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나타나기 전까지 BOJ의 긴축 전환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사진=공동취재단)


◇ 韓, 대외 불안에 취약…환율 변동에 민감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자본 유출을 겪으며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던 경험이 있다. 그로 인해 환율 변동성은 한은이 예의주시해야 하는 최대 변수로 여겨진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한은이 추가로 금리를 인상한다면 그것은 원·달러 환율 급등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한다. 역으로 환율만 안정된다면 금리를 더 이상 올릴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다.

우리나라는 소규모 개방 경제, 수출 제조업 국가답게 대외 변수에 취약하고 환율 변동성도 큰 편이다. 더구나 최근처럼 최대 수출국인 중국 경기가 불안해지고 미국은 상대적으로 경기가 양호해 위안화가 약세를 보이고 달러화가 오르는 상황에선 환율이 급등하기 좋은 환경이다. 21일 원·달러 환율은 1342.6원에 거래를 마쳐 작년 11월 23일(1351.8원) 이후 9개월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환율 급등은 한미 금리 역전폭이 2%포인트나 되는 상황에서 한은의 금리 인하 전환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환율이 급등하면 80달러대의 국제유가와 맞물려 수입물가 상승세가 높아지고 이는 물가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에 경기 하방리스크가 커지고 있음에도 한은의 금리 인하 시점이 지연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데일리가 24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두고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경제연구소 연구원 1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6명이 내년 2분기께야 금리 인하가 가능할 것이라고 답했다. 연내 금리 인하는 3명에 불과했다. 5월까지만 해도 연내 금리 인하가 절반 가량이었으나 금리 인하 시점이 지연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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