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을 다녀오는 길에 오랜만에 고교 동창들을 만나고 왔다는 아내의 안색이 ‘별로’였다. “남편 직업을 묻길래 신문기자라고 했더니 묘한 표정이 되더라고요.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기자가 배우자라는 걸 시답잖게 생각하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영 그렇더라고요...”
초년병 기자 시절인 80년대 말 어느 날, 아내와의 반짝 대화에서 주워들은 ‘기자 직업’의 바깥 이미지는 뜻밖이었다. 가정을 이룬 상태에서 일반 직장을 다니다 나름의 소신으로 택한 일터였기에 보람은 작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풋내기였지만 사명감 역시 만만치 않았던 터였다. 그런데 왜...
의문이 풀리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기자 생활이 길어질수록, 그리고 언론사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잘못된 기사와 이로 인한 피해 등에 대한 비판이 꼬리를 물수록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음을 알게 됐다. ‘엉터리 ’‘삼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기사는 물론 언행에도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이태원 참사로 후속 뉴스가 뜸해졌지만 국정감사 마지막 날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동훈 장관을 상대로 날린 질의는 ‘직업윤리’를 되짚어 보게 한 대목이었다. 질의 중 요체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 장관이 심야 시간까지 서울 청담동 바에서 술판을 벌였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목하고 싶은 것은 내용의 맞고 그름이 아니다. 사실 확인 과정을 김 의원이 철저히 거쳤는가 하는 것이다. 김 의원은 정치 입문 전 오랜 시간을 언론사에서 보낸 데다 청와대 대변인까지 거쳤다. 그렇다면 기자 시절 금과옥조처럼 머리와 가슴에 새겼던 ‘사실 확인’의 불문율을 되살려야 했다. 문제의 주점을 실제 확인하는 등 제보 내용의 진위를 정밀하게 검증해야 했다. 대통령의 동선에 얼마나 많은 경호 인력이 동원되고 사전에 철통 같은 경비와 체크가 이뤄지는지를 잘 아는 경험을 바탕으로 제보를 냉정하게 뜯어봤어야 했다. 맞기만 하다면 그의 발언은 윤 대통령과 한 장관에게 핵 펀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지자들도 환호작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매는 날카롭고 각오는 비장했지만 그는 한 장관의 반격에 꼼짝없이 궁지로 몰렸다. “내가 술을 못 마신다는 것을 아느냐”는 한 장관의 답변과 “무엇을 걸겠느냐”는 역공에 난감해하는 모습이 수없이 전파를 탔다. 기자 시절 그토록 배우고 지켰던 팩트 체크의 정신과 오보로 타인이 입을 피해를 경계해야 하는 직업윤리가 아쉬운 장면이었다.
정치인과 기자의 공통점 중 하나는 공익을 위해 일한다는 나름의 사명감일 것이다. 직업윤리도 닮아 있다. 법과 도덕의 선을 넘어선 안 되고,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도 있다. 말과 행동으로 주위를 현혹시키거나 거짓말로 여론을 조작하려 해도 안 된다. 수사권이 없는 기자들로서는 확인에 또 확인을 거칠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 역시 치밀하게 자료 조사 및 확인 작업을 벌여야 한다. 김 의원의 발언을 언론의 관심과 조명을 의식한 ‘광인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극단적 시각도 있다. 하지만 한 장관을 겨냥한 민주당 차원의 적개심과 망신주기 의도가 김 의원 발언을 통해 쏟아졌다는 느낌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민주당과 김 의원은 한 발짝 멈추고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자의 펜과 정치인의 입은 상대방을 겨냥한 날카로운 비수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의 발등을 찍을 수도 있어서다.
“기자면 답니까.”“의원이면 아무 말이나 해도 됩니까”
필자를 포함한 이 시대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자신을 향해 날아들 수 있는 비난과 조롱의 화살을 잊어선 안 된다. 사실 여부를 가리는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김 의원은 주한EU대사의 발언을 왜곡 전달했다가 항의를 받고 사과문을 올리는 망신을 또 자초했다. 언론사 밥을 먹는 처지에서 뒷맛이 영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