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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1933년 무당 일을 하던 집안에서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인의 집안은 대대로 음악 활동을 하며 진도씻김굿 명인 고(故) 박병천 집안을 비롯한 예인 집단과 교류해왔다. 고인 또한 집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예인으로 자라났다. 같은 마을에 살던 판소리 명창 신치선에게 소리를 처음 배웠고, 14세에 여성 창극단에 입단해 청년 시절 군 복무 시기를 제외하고는 1970년대까지 계속 유랑극단에서 활동했다.
1975년 진도 지방에서 천수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동네 상여꾼들이 유족을 위로하고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행한 진도다시래기 복원 활동에 참여했다. 1979년 국립극장에서 진도다시래기 공연을 했다. 진도다시래기는 무속단체인 신청(神廳)을 중심으로 조직된 전문 예인들이 전승했으며, 상례 풍속과 민속극 연구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1985년 진도다시래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고인은 고 조담환과 함께 기량을 인정받아 이 종목 보유자(인간문화재)가 됐다. 세한대 전통연희학과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9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 전날 전남 신안 하의도의 김 전 대통령 생가에서 해학과 웃음이 넘치는 굿판을 벌였다.
전통 연희 무대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심청전, 춘향전, 장화홍련전 등 고전 판소리부터 신파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대에 섰다. 특히 앞을 보지 못하는 심 봉사 역할로 유명했는데, 2005년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에서 감우성이 고인의 심 봉사 연기를 맹인 연기의 표본으로 삼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족으로는 유랑극단에서 함께 활동한 부인 김애선 진도다시래기 명예 보유자와 진도다시래기 전승 교육사인 아들 민수 씨, 딸 계순·계옥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