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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의 그림&스토리]<22>자연스럽게 살어리랏다

오현주 기자I 2021.07.09 03:30:00

▲조충현 '우중구압' & 안도 히로시게 '쇼노의 소나기'
한국화에서 드문 빗줄기 표현한 조중현
비 오는 날 분주함 담은 안도 히로시게
장마·태풍 닥치면 움츠러들기 마련이나
더불어사는 자연 속 변화, 필수적 '섭리'

조중현이 1958년에 그린 ‘우중구압’(雨中驅鴨). ‘빗속에 오리를 몰다’란 뜻이다. 뛰어난 작품성에 비해 한국 근대회화작품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림이다. 한국은행이 소장한 이후 소장품전 등을 통해 일반에 소개하면서 그 진가를 새롭게 확인하고 있다. 새·동물·물고기·꽃 등을 소재로 수묵화·세필채색화를 즐겨 그렸던 작가는, 근대 한국화 6대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스승 이당 김은호(1892∼1979)로부터 “내가 길러본 제자 중 제일가는 재주”란 극찬을 받기도 했다. 종이에 수묵채색, 141×186㎝, 한국은행 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올해는 7월이 돼서야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통상 장마는 6월 셋째·넷째 주쯤 시작하는데 올해는 장마 같은 소나기만 뿌려대더니 이제야 진짜 장마가 찾아왔습니다. 특이하게도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올해 장마가 예년에 비해 일찍 시작됐다고 하니 이것도 지구환경변화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장마철에 내리는 비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오던 기억, 우산을 들고 버스정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추억이 늘 스쳐 지나가지요. 비와 관련된 영화 속 장면이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비가 내리는 그림은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서양화로는 몇몇 작품이 생각나지만, 비 내리는 장면을 직접 묘사한 한국화는 한 점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지요.

전통 채색수묵화의 현대적 변화 ‘우중구압’

비 그림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탓만은 아닌 듯합니다. 실제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를 통틀어 여러 도록이나 자료를 찾아봐도 빗방울을 묘사한 그림은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의나 도롱이를 입고 있는 인물이 등장해 ‘우중’(雨中)이란 것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빗방울은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옛 화가들은 비에 주목하기보다 비를 통한 심상을 표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고, 동양의 미감에 반해 여백 없이 빗방울로 화면 가득 선을 긋는 데 거부감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해봅니다. 이렇게 빗줄기를 표현하지 않는 경향은 근대미술에서도 이어지는데요, 그중 거의 유일하다고 할 ‘비 그림’이 있습니다. 근대회화에서 현대미술로 전환하는 시기인 1958년에 그려진 조중현(1917∼1982)의 ‘우중구압’(雨中驅鴨)입니다.

‘우중구압’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려는 듯 급하게 막대기를 내저으며 오리떼를 몰고 가는 소년을 그린 작품으로, 소년의 표정과 동작에서 돋보이는 생동감이 특징입니다. 상체를 드러내고 반바지만 입은 구릿빛 소년의 모습에서 향토색 짙은 여름날 정경이 세밀한 묘사력에 의해 생생히 살아나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빗줄기였는지 날씨는 갑자기 어두워지고 비바람에 나부끼는 버들잎은 긴박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흰색으로 묘사한 빗줄기는 비 오는 날의 어두운 갈색 톤 배경을 헤치며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소년 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것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한 오리들입니다. 여기에서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데 곡선을 많이 쓴 오리와 직선으로 내리치는 빗줄기가 교차하면서 순간의 상황이 더욱 강조되는 것입니다. 색채도 한몫 합니다. 녹색의 수양버들, 갈색의 땅, 흰색의 빗줄기 등 여러 색채가 조화를 이루면서 그림의 품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화가 조중현은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1935년 이당 김은호(1892∼1979) 문하에 들어가 전통회화를 배웁니다.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데이고쿠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몇 차례 특선을 받으며 전문화가로 성장합니다. 광복 후 귀국해 향리에서 미술교사로 일하면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1965년부터는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합니다. 주로 동물·화조화를 그렸는데 초기에는 김은호의 채색수묵화풍을 이었으나 점차 부드러운 필선과 서정적인 구도의 현대적 수묵화로 변모했습니다. 그중 ‘우중구압’은 전통 채색수묵화의 현대적 변화를 보여주며 흰색 빗줄기를 처음으로 시도한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고흐가 사랑한 화가 안도 히로시게

빗방울을 표현하지 않았던 한국과 달리 일본 우키요에(17∼20세기 일본 에도시대의 일상·풍경·풍물 등을 그린 풍속화. 주로 목판화로 제작)는 유독 비 내리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가장 대표적이라면 우키요에의 대가 안도 히로시게(1797∼1858)의 ‘쇼노(庄野)의 소나기’(1833)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안도 히로시게의 ‘쇼노의 소나기’(1833). 도카이도를 따라 에도에서 교토까지 490㎞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하며 거친 53개 역을 스케치한 연작 ‘도카이도 고주산쓰기’(동해도 53차) 중 45번째 역인 ‘쇼노’의 풍경을 그렸다. 우키요에 화가로 독립해 이듬해 제작한 이 연작 덕에 작가는 풍경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이후 ‘우키요에 대가’ 반열에까지 올랐다. 목판화, 21.9×34.6㎝,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화면 가득히 빗줄기가 사선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갑작스런 소나기에 우산을 앞으로 내리고 걷는 사람과 도롱이를 두르고 모자를 누른 채 황급히 뛰어가는 사람이 보입니다. 왼쪽으로는 도롱이를 뒤집어쓴 사람과 그 도롱이도 입지 못한 가마꾼들이 모자만 쓰고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가마꾼 중 앞선 사람은 상의를 걸쳤으나 뒤 가마꾼은 상의도 없이 일본식 기저귀인 훈도시만 차고 있어 엉덩이가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식 팬티가 보급되기 전까지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이런 훈도시를 많이 입었습니다.

가마를 탄 인물은 천으로 덮여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손으로 가마 옆을 잡고 있어 급하게 이동하는 데 따른 불안한 심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 양쪽의 나무와 멀리 숲의 나무들은 비의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몸을 누이고 있습니다. 멀리 나무들의 실루엣을 이으면 청록색의 길과 화면 왼쪽에서 만나, 일점 투시 효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좌측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림의 쏠림을 막는 것은 그 반대 방향으로 황급히 내달리는 두 사람입니다. 이런 구성은 작품의 긴장감을 높여 기운생동하게 합니다.

비는 아주 가느다란 선을 연속으로 그어 표현했는데 이 작품이 목판화임을 감안하면 원판에 얼마나 가늘게 선을 새겼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화가로도 유명한 안도 히로시게는 일본 판화 우키요에를 대표하는 서정적 풍경화가로 ‘그림으로 시를 쓰고 산천을 노래한 풍경화의 천재’로 불렸습니다. 1832년 그는 쇼군(將軍)의 공식 사자를 수행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도카이도를 따라 에도에서 교토까지 490㎞에 달하는 거리의 53개 역참에서 하룻밤씩 묵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수많은 풍경과 역을 스케치합니다. 그러곤 이듬해 도카이도의 시발점과 종착점, 각 역참을 그린 연작 판화 ‘도카이도 고주산쓰기’(東海道五十三次·동해도53차)를 발표하며 자신의 천재성을 알렸습니다.

‘쇼노의 소나기’는 45번째 역 ‘쇼노’를 스케치한 작품입니다. 검정 색조를 많이 사용한 하늘과 검은 실루엣으로만 표현한 대나무숲이 비 오는 날의 침울한 감정을 표현했으며 인물들의 소란스러운 행동은 소나기 내릴 때의 급한 마음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일본 전통적 풍경화에 서구의 원근법과 빛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술을 적용,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강조한 시적 호소력이 충만한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해가 닥치면 두려운 마음이 들고 움츠러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마나 태풍 등은 자연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로 꼭 필요한,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비 내리고 눈 날리고 바람 부는, 자연의 복잡한 섭리에 대비·대처하는 일은 우리 인간의 몫이 됩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자연의 일부로 자연에 섞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중현의 ‘우중구압’ 속 소년과 안도 히로시게의 ‘쇼노의 소나기’ 속 가마꾼이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란, 결코 좁힐 수 없는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올해 느지막하게 찾아온 장마가 부디 심술궂지 않게 지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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